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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영지 Dec 31. 2018

7. 연말의 무드





자라는 동안 나에게는 '연말'에 떠올리게 되는 어떤 분위기가 있었다. 11월이 되면 나는 엄마를 졸라 크리스마스 장식을 꺼냈다. 고모가 대전에 사시는 동안 꽃집을 하셔서 우리 집에는 해마다 다양한 크기와 색의 트리가 생겼다. 그 위에 엄마가 결혼 전부터 차곡차곡 모아온 장식들을 걸었다. 트리에 전구를 감고 그런 전구를 커튼 위에도 걸었다. 밤이면 나는 늘 불을 끄고 전구를 켰다. 거실에는 하얀색, 빨간색, 초록색, 파란색 전구가 나름의 규칙대로 반짝였다. 나는 그중에서도 빨간 불빛이 촌스럽다고 생각했고, 모든 색의 전구가 한꺼번에 켜지는 때가 가장 예쁘다고 생각했다.


겨울방학은 내가 일년 중 제일 좋아하는 때였다. 엄마는 우리의 방학을 좋아했다. 엄마는 자주 따뜻한 음식을 만들어줬다. 호빵이나 호떡, 스프와 군고구마, 그리고 핫케이크를 해줬다. 마트에서 파는 핫케이크 가루에 달걀을 넣고 반죽하면  프라이팬에 넓적하게 반죽을 붓고 익히면 피자처럼 넓고 얇은 팬케이크가 됐다. 엄마는 빵이 익을 때쯤 병희랑 나를 불러 조금씩 떼줬다. 뜨끈한 빵은 정말 맛있었다. 우리는 그 빵을 먹으며 자주색 암막 커튼을 치고 카펫 위에 배를 깔고 누워 오래된 영화들을 봤다. '로마의 휴일'이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사운드 오브 뮤직'처럼 오래된 영화를 좋아하게 된 것은 이때의 일이다. 나는 내복을 입고 흔들의자에 파묻혀 해리 포터를 책이 너덜너덜해지도록 읽었다. 아파트 단지 중 가장 마지막 동이었던 우리 집은 마을 뒷산을 마주 보고 있었다. 우리 집은 9층이었는데, 눈이 내린 아침이면 아빠와 엄마가 짜잔, 하고 커튼을 걷었다. 산을 빼곡하게 채운 소나무들은 흰 눈으로 뒤덮여 있었다. 그런 산을 눈앞에서 보는 것은 내가 가장 사랑하는 장면 중 하나였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 교회에서는 늘 연극이나 뮤지컬을 준비했다. 나는 노래하는 것을 좋아해서 늘 찬양팀이나 어린이 성가대 반에 있었고 그런 공연에는 빠지지 않았다. 그래서 겨울에는 늘 교회에 모여 공연을 준비했다. 고등학생이 되어도 마찬가지였다. 학교가 끝나면 우리는 곧장 교회에 모였다. 중학생이 된 후부터는 다들 시간을 아끼려고 교복을 입은 채로 교회에 왔다. 우리는 오디션을 치러 배역을 따고 떡볶이와 순대를 먹으며 대본을 외웠고 의상이랑 배경도 선생님들과 함께 만들었다. 학교의 기말고사 기간에도 모여 연습하는 건 엄청나게 힘들었지만 그래서 더 재밌었다. 노래와 연기를 연습하며 힘든 것은 정말 즐거운 일이었다.


그리고 크리스마스이브가 되면 나는 친구들과 모여 오후 내내 교회에 모여 준비해온 공연의 리허설을 했다. 의상을 입고 눈과 입술을 멍든 것처럼 분장했다. 교회는 그리 크지 않았지만 지하의 예배당은 천장이 높았다. 큰 돌들을 붙여 만든 벽을 지나 무대로 연결되는 문 뒤에 모여서 순서를 기다리는 동안 긴장돼서 갈비뼈와 잇몸이 간질간질했다. 그 기분이 너무 좋았다. 나는 늘 그 긴장감이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무대에 오르지 않고 지금 여기에서 시간이 멈춰버리길 바랐다. 나는 무대 위에서의 쾌감보다 그것을 준비하고 반복하는 일을 더 좋아했다.


성탄 전야제에는 온 가족이 다 왔다. 초등학생 때 우리가 다니던 교회에서 비디오카메라를 가진 집은 우리밖에 없었다. 아빠와 엄마는 비디오카메라와 필름 카메라를 들고와 나와 병희를 찍었다. 공연이 시작되면 조명 때문에 아빠와 엄마를 볼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들이 어떤 표정을 짓고, 또 얼마나 열정적으로 나를 찍고 있을지는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가끔은 어른들도 무대에 섰다. 가끔 엄마가 속해있던 중창단이 노래할 때, 나와 친구들이 같이 서기도 했다. 아빠는 점잖은 양복에 선글라스를 쓰고 똑같은 옷을 입은 아저씨들과 요상한 춤을 신나게 췄다. 아빠는 그런 것을 즐거워했다.


모든 순서가 끝나면 나는 다급하게 아빠와 엄마를 찾았다. 밤새 친구들과 교회에서 놀아도 될지 허락을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아빠는 눈이 좋아서 멀리서도 나를 쉽게 찾았다. 온 얼굴로 웃으며 "딸!"하고 외친 아빠는 들떠서 커진 목소리로 내가 무대에서 얼마나 잘 했는지 딸밖에 안 보였다고 칭찬하기 시작했다. 엄마는 내가 그 부분에서 왜 그런 표정을 지었는지, 배는 안 고픈지, 그런 것들을 물었다. 나도 같이 들떠서 빠르게 말했다. 무대에 올라가기 전에 엄청나게 떨렸던 것과 무대 위에서 있었던 실수나 누군가의 기지로 넘어간 일을 말했다. 그리고 아빠와 엄마는 늘 교회에서 놀 수 있도록 허락해줬다.


전야제를 마치고 교회에서 친구들, 선배들과 대여섯 명씩 조를 짰다. 그리고 각 조에 두세 명씩 어른들이 들어왔다. 우리는 그 집사님들의 차를 타고 각자 맡겨진 동네로 갔다. 같은 교회에 다니는 가정의 집에 가서 문을 두드렸다. 그러면 자지 않고 기다리고 있던 어른들이 문을 열었다. 우리는 현관 앞에서 속삭이듯 작은 소리로 아기 예수의 탄생을 축하하는 찬양을 불렀다. 지금은 반대가 많아 사라진 '새벽송'이라 부르는 행사였다. 그때는 우리의 소리를 듣고 옆집 사람들도 나와서 함께 듣기도 했다. 고요한 밤 거룩한 밤, 노엘 노엘 이스라엘 왕이 나셨네. 그러면 어른들은 준비해둔 과자나 선물, 돈을 우리에게 줬다. 우리는 그걸 받아서 우리 조의 어른들이 가져온 자루에 담았다. 가끔은 추운데 고생한다며 어묵이나 코코아를 준비해주는 분들도 있었다. 가야 할 곳이 많을 때는 후루룩 마셨고, 마지막 집일 때는 집안에 들어가 천천히 마셨다. 우리가 새벽까지 돌며 가져온 것들은 어려운 이웃에게 보내질 선물이었다. 우리는 교회로 돌아와 밤새 게임을 하며 놀았고 다음 날 아침의 성탄 예배에는 늘 졸았다.


크리스마스가 지나면 우리 가족은 지상파 방송사의 연기대상, 연예대상 일정을 확인했다. 그리고 아직 치우지 않은 트리의 전구를 켜고 앉아서 다 함께 시상식을 봤다. 맞아, 저 사람이 잘 했지. 저 사람 엄청 웃겼어. 그 드라마 재밌었는데. 우리는 그 시상식을 엄청 열정적으로 봤다. 그리고 이어지는 특선 영화들을 다 같이 봤다.


마지막 밤에는 늘 송구영신 예배에 갔다. 우리는 예배 시간보다 일찍 가서 예배당의 길고 좁은 나무 의자에 쭈루룩 앉았다. 우리는 다 같이 다음 해의 기도제목을 적었다. 우리는 떨어져 지내는 가족들, 건강, 지혜, 그리고 아빠의 사업을 위해 기도했다. 어린 시절 오랫동안 다녔던 돌벽의 지하 예배당에서는 그날 언제나 성만찬을 했다. 세례를 받은 사람들은 줄을 서서 아주 얇고 동그란 밀가루 전병과 엄지손가락만 한 컵에 담긴 포도주를 마셨다. 그건 구속과 부활을 기념하는 것이었다. 나는 밀가루 전병이 입안에서 녹으며 혓바닥에 붙는 게 좋았다. 그 위에 교회 어른들이 직접 담근 알싸한 포도주가 들어가면 전병은 금세 사라졌다. 어두운 예배당에서 피아노 반주를 들으며 그것들을 입안에 넣고 돌벽을 지나 자리로 돌아오는 동안 좀 더 경건한 마음이 들었다.


연말이 지나고 나면 나는 늘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계절은 같아도 12월과 1월의 느낌은 완전히 달랐다. 낭만과 축제를 다 같이 즐겼는데, 이제는 모두 모른 척하는 것만 같았다. 분명 아주 따뜻하고 반짝이는 것이 가득했는데 힘없는 햇빛에 그저 추운 날이 되어버리는 것 같았다. 그 후로도 우리는 늘 연말이 되면 따듯한 음식을 해먹었고, 나와 병희가 더는 무대에 오르지 않아도 전야제에 갔다. 아빠는 크리스마스에 온 가족이 함께 있길 원했다. 우리는 집에 돌아와 영화를 보고 시상식을 챙겨봤다. 그리고 송구영신 예배에 갔다. 우리는 언제나 가족과 건강, 지혜와 우리 모두의 일을 위해 기도했다. 해가 바뀌면 학년이 바뀌던 때에는 새해가 오는 것이 아주 큰일이었다. 새해는 이전과 같을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어제가 가고 내일이 오는 것뿐이다. 낭만을 흘러가는 시간에 빼앗길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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