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영지 Jan 06. 2019

8. 그들은 그 후로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엄마에게 아빠와 처음 만난 순간을 물은 적이 있다. 아빠는 옆에서 신문을 보고 있었던가, 아무튼 다른 일을 하며 내 질문을 엄마에게 맡겨뒀다. 엄마는 갑자기 장난과 고음을 섞어 꾸며낸 목소리로 말을 시작했다.

     

"엄마가 대학에 처음 딱 온 날이었어. 정문 앞에서 택시 문을 열고 내리는데 누가 다가오더니 엄마 손목을 딱 잡는 거야. 그러더니 이렇게 말한 거지. '당신을 만나기 위해 이곳에 왔습니다.' 그게 아빠였지."     

     

엄마는 거의 웅변을 하듯 큰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반응했다. 으엑, 느끼해. 아빠에게 진짜냐고 물었더니 아빠는 생전 처음 들어보는 이야기라고 했다. 나는 진짜 이야기가 뭐냐고 자꾸 물었지만 엄마는 어깨를 으쓱하고 더 이상 말해주지 않았다. 엄마는 짓궂은 데가 있어서 자주 나를 골리고 속으로 즐거워했다.     

     

엄마가 진짜 이야기를 들려준 건 시간이 좀 더 지나서였다.     


대학교 신입생이던 은호는 신입생 환영회에 갔다. 친구들과 앉아있는데 저 멀리서 낙호가 남자애들 몇 명과 같이 들어왔다. 그는 다른 학교의 로고가 새겨진 체육복을 입고 큰 목소리로 인사하고 떠들며 여기저기 참견하고 다녔다고 한다. 은호는 그를 보고 와, 쟤는 뭔데 다른 학교 애가 와서 설치고 다니지,라고 생각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같은 과였고 은호의 일 년 선배였다. 둘은 두 살 차이인데 낙호는 재수를 해서 이제 막 2학년이 되었다. 왜 다른 학교의 옷을 입었는지 은호는 모르고, 낙호는 까먹었다.


어느 날, 경상대 체육대회가 끝나고 밴드가 무대에서 열심히 연주하는데 충청도의 새내기들은 목석처럼 우두커니 서서 박수만 치고 있었다. 서울에서 온 은호는 시골 촌놈들 진짜 재미없게 논다고 생각하고 옆에 있던 낙호에게 말했다. 형, 우리 춤추게 해 줘요. 은호는 수많은 선배들을 형이라 불렀다. 터프했기 때문이다. 낙호는 어떻게 해줄까 물었고 은호는 당돌하게 말했다. 선배 나랑 올라가서 춤춰요.


그래서 둘은 무대에 올라가 춤을 췄다. 그 모습을 보고 박수만 치던 사람들도 무대로 뛰어오르기 시작했다. 결국 다 같이 무대와 운동장에서 춤을 췄다. 그날 낙호는 은호에게 데이트를 신청했다. 그리고 첫 데이트를 하는 날, 은호를 데려다주던 골목 가로등 아래에서 낙호는 '은호야, 나랑 꼭 결혼하자'라고 말했다. 은호는 '응'이라고 답했다. 은호는 그런 대화를 하고 나면 당연히 결혼해야 하는 줄 알았다. 그 이후로 오랫동안 그렇게 생각했다.     


은호는 얼굴이 하얗고 세련되고 예뻐서 그를 좋아하는 남자들도 꽤 있었고 미팅도 들어왔다. 하지만 낙호는 무섭고 발 넓은 선배인지라 늘 잘 되진 않았다. 낙호는 세월이 흘러 알고 보니 굉장히 정적이고 낭만파였지만 젊은 시절엔 그것을 발휘할 방법을 몰랐다. 늘 친구들과 운동하고 몰려다니느라 바빴고 인상적인 데이트도 계획할 줄 몰랐으며 적극적으로 마음을 표현하지도 않았다. 그러던 낙호가 군대에 가기 전 은호에게 꼭 기다려달라고 하였지만 은호는 한마디로 싫어 라고 말하였다. 군대에 간 낙호는 하루가 멀다 하고 편지를 보내왔다. 은호는 군대로 떨어져 있는 동안 자연히 멀어지겠거니 했지만 구구절절 편지를 보내는 낙호가 안쓰러워 답장을 보냈다. 둘의 만남은 다시 이어졌다.     


그렇게 가늘고 긴 연애를 하며 둘은 8년 뒤 결혼했다. 제주도로 둘이 배낭여행처럼 떠난 신혼여행은 재미없어 하루를 앞당겨 돌아왔다지만 그들은 그 시대에 심플하고 세련된 커플룩을 입고 영화 포스터 같은 사진들을 남겼다. 그리고 영지와 병희를 낳았고 그 후로 수많은 산과 바다를 함께했다.     

     

오랜 동화들은 두 사람의 시작을 '그들은 그 후로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라는 말로 마무리한다. 행복이란 쉽게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서 역시나 무책임한 말일 수 있겠다. 행복이 커다란 일로 찾아오는 경우는 별로 없고 진짜 사랑은 감정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어서 둘의 행복은 어지간한 노력으로 얻어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두 사람의 역사가 시작된 일을 살펴보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당사자들은 쉽게 잊지만 그때의 낭만은 그들이 행복을 찾아갈 길을 알려준다. 추억은 힘든 현재를 버틸 힘을 주고, 거칠어진 지금을 미워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는 그 길을 잘 찾아가야 한다.


그들이 행복을 찾아가는 데는 아주아주 오랜 시간이 걸렸다. 둘은 너무나 달랐고 그래서 행복을 위해서는 서로 희생해야 할 것이 많았다. 서로를 포기할 수 있는 무수한 기회가 있었지만 그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들이 싸우고 화해하고 아끼고 미워하며 행복을 찾아가는 길을 나는 오랫동안 지켜봤다. 내 몸이 자랄수록 그들의 행복도 길을 잃었다가, 다시 길을 찾아갔다. 그렇게 찾은 행복은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매거진의 이전글 7. 연말의 무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