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줄리 앤 줄리아>
시절이 아무리 바뀌어도 어쩔 수 없이 여자들의 관심을 끄는 것들이 있는데, 요리도 그중 하나인 것 같다. 아무리 배가 불러도 맛있는 것을 보면 다시 공간을 만들어낸다는 여자들의 위만 봐도 알 수 있듯, 맛있는 것을 먹고 싶고 더 나아가 직접 만들고픈 욕구는 다수의 여자들에게 들어있다. 게다가 보기에도 맛있는 음식에 잔잔한 분위기와 매력적인 여성들이 더해진 영화는 오랜 시간 사랑받으며 기억된다. 아직도 수많은 블로그와 카페나 음식점의 이름이 '카모메 식당'인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영화 <줄리 앤 줄리아>는 그런 관객들을 위한 영화다(엄마는 함께 보시다가 도무지 내 취향을 함께하지 못하겠다며 중도 포기하셨는데, 절대다수를 위한 영화는 아닌 듯하다). 냉동 요리와 기름진 인스턴트가 주를 이루던 미국의 음식 사회에 프랑스의 다양한 요리법을 전한 줄리아 차일드와 그녀의 책에 있는 레시피로 일 년간 도전하며 마음속에 묻어뒀던 작가에의 꿈을 이룬 줄리 파웰의 이야기다. 프랑스와 유럽 등지에서 낭만적인 스타일의 삶을 보여주는 줄리아와, 빠듯한 살림에도 살뜰히 남편과 행복하게 살아가는 줄리의 삶을 보는 것은 우리에게 어떤 만족감을 준다. 그리고 그녀들의 성실한 시간을 보며 그것을 보는 우리도 우리만의 경력을 만들어낼 수 있으리라는 용기를 얻기도 한다.
그럼에도 <줄리 앤 줄리아>를 보고 가장 하고 싶은 이야기는, 요리도 여자도 경력도 아닌, 바로 그녀들의 '남편들'에 대한 것이다. 그러니까 그들의 '결혼 생활'에 대한 이야기 말이다. 스무 번은 족히 돌려 보며 나에게 이 영화는 '부부의 이야기'로 와 닿았다. 두 여자의 성공이 아닌, 두 부부가 이뤄낸 이야기. 국가를 이동하며 근무하는 남편 폴을 따라 함께 이곳저곳 함께 다니며 생활하던 줄리아는 남편을 위해 떠나온 곳에서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고민한다. 그렇게 시행착오를 겪으며 최고의 즐거움을 발견한다. 바로 먹기와 요리하기. 그리고 그녀는 동생에게 보내는 편지에 말한다. 평생 자신만의 경력을 꿈꿨는데, 그 길을 발견한 지금 천국을 사는 것 같다고.
줄리아는 폴을 사랑하기에 반복되는 이민 생활에도 불만 없이 그를 지지한다. 그리고 함께하는 시간에 감사하는 것으로 스스로에게는 외롭고 무의미할 수 있는 시간을 지나간다.
그녀는 남편을 사랑하고 음식을 사랑하기에, 그리고 달리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어 시작한 일을 배우는 도중에 즐거움을 찾았다. 영화를 보고 난 뒤 이 부부의 모습이 너무나 사랑스러워서 결국은 줄리아 차일드의 <My life in Paris>를 읽었다. 그들은 '사랑'에 관련된 특별한 날이 되면 함께 찍은 사진으로 카드를 만들어 지인들에게 보내며 기념하고 서로에게 하는 사랑 표현을 아끼지 않는다.
폴은 그녀의 사랑을 더 큰 사랑으로 채우고 그녀의 꿈을 정서적으로, 그리고 재정적으로 응원해주는 배우자다. 요리에 빠져 부엌에만 있는 그녀와 함께하기 위해 부엌에 앉아있고 밸런타인데이 선물로 그녀가 요리학교에서 필요한 재료들을 챙겨주며, 모두의 앞에서 빨간 하트를 달고 말한다.
"You are the butter to my bread, and breathe to my life."
살아가다 보면 언제나 좋은 일만 있는 것은 아니기에 그들에게도 어려움은 온다. 줄리아는 아이를 원하지만 갖지 못하고, 동생의 임신 소식을 듣고는 축하와 서러움이 엉긴 눈물을 흘린다. 폴은 평생을 바쳐 일한 나라에서 자신의 경력을 의심하며 며칠을 갇혀 심문을 받고, 줄리아가 친구들과 8년의 시간을 들여 쓴 책은 출판사마다 거절당한다. 그럴 때마다 그들은 함께한다. 위로하고 안아주고 힘이 되어준다. 심문을 받은 뒤 자신의 평생의 헌신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 자신에게는 무엇이 남는 것인지 모르겠다며 힘들어하는 폴에게 줄리아는 말한다. 내가 쓰고 있는 이 책은 '우리의 책'이라고. 당신이 없이는 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그리고 거절당하는 것에 지친 줄리아에게 폴은 말한다. 누군가 당신의 책을 알아볼 것이라고. 그 책이 세상을 바꿀 것이라고. 그리고 그녀의 책을 몰라보는 이들에게 시원하게 말한다. 썩을 것들.
이제 2002년 퀸즈에 살고 있는 줄리와 에릭의 이야기다. 둘은 넉넉지 않은 사정으로 원치 않게 퀸즈의 피자가게 위층집으로 옮겨오게 된다. 길거리에는 쓰레기가 날리고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공사장이며 밤이면 덤프트럭들이 지나가며 굉음을 낸다. 게다가 매일 출근해서 하는 일은 9.11 테러로 가족을 잃은 이들의 사정을 들어주는 일이다. 잘 나가는 친구들은 자랑하느라 바쁘고 자신의 일을 무시하곤 한다. 줄리의 일상은 자꾸만 우울해지고 그것을 이겨내는 그녀만의 방법은 바로 요리다. 줄리는 확실한 것이 없는 삶을 살고 집에 돌아와 요리를 하는 동안만큼은 달걀과 우유 설탕과 초콜릿을 섞으면 걸쭉해질 것을 '아는' 것이 자신에게 위안을 준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녀의 남편, 에릭은 그런 그녀의 곁에서 초콜릿을 찍어 먹으며 '오늘 힘들었어?'하고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준다.
줄리는 소심하고 착하면서도 신경질적인 여자다. 작가를 꿈꾸던 대학 시절, 친구들은 그녀가 더 나은 삶을 살 것이라 생각했고, 아마 그녀 스스로도 어떠한 우월감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은 현실적인 삶을 위해 자신의 꿈과는 전혀 다른 일을 하며 그녀의 집과 직업, 이 삶 자체에 신경질적인 사람이 됐다. 맛있다고 말하는 남편에게 '죽어라고 저어서 그래'라고 비꼬듯 답하기도 하고, 옆에서 레시피를 읽어주는 친구에게 짜증을 내기도 한다. 나는 작가가 될 수 없을 거야, 나는 진짜 요리사가 아니기 때문에 할 수 없을 거야, 누가 내 블로그를 읽겠어? 그녀가 이런 말을 할 때면 에릭은 말한다. 줄리아 차일드도 처음부터 줄리아 차일드는 아니었잖아. 자기야 말로 작가지. 그러고는 그녀가 말하는 소소한 기억들에 미소를 짓는다. 그리고 줄리는 그녀만의 글 공간을 만들고 도전하게 된다.
직장을 다니며 남는 시간에는 온통 부엌에 있는 줄리는 점점 바빠지고 자신의 블로그에 완전히 몰입하게 된다. 일종의 나르시시즘에 빠진 그녀와 그것을 견디기 힘들어진 에릭은 결국 싸우게 된다. 그리고 줄리는 생각한다. 그녀와 줄리아 모두 공무원이었고, 착한 남편을 만났다. 줄리아는 그런 남편과 함께할 자격이 충분했지만, 자신은 아니라고. 그리고 자신의 블로그를 '싫어한다'는 줄리아의 평가에 마음이 작아진다. 줄리의 머릿속에서 그녀에게 말을 거는 줄리아는 완전한 사람이다. 화를 내지도 않고, 모두를 사랑하며 사랑받는 사람. 그러나 줄리아도 그들이 자신을 싫어한다며 우울해하기도 하고, 누군가를 미워하기도 하는 사람이었다. 그때에도 에릭은 그녀가 놓치는 것들을 알려준다. 당신의 도전을 이해하지 못하는 줄리아 차일드는 완전하지 않다고. 좌절하고 꿈을 묻어둔 채 살아가던 당신을 구한 건, 스스로 구한 것이라고. 멀리 떠밀려가지 말라고 알려준다.
에릭은 줄리의 서른 번째 생일에 그녀가 푹 빠져있는 줄리아 차일드의 것과 비슷한 진주 목걸이를 선물했다. 그리고 줄리는 말한다. 당신과 줄리아 덕에 서른을 잘 지나갈 수 있을 것 같아. 에릭은 정말로 그렇게 돕는다. 에릭은 가난하고, 폴이 줄리아에게 준 기회만큼 재정적으로 줄리를 도울 수는 없었다. 하지만 줄리의 묻어뒀던 꿈을 이해하며 그녀가 인생 처음으로 도전한 것을 이뤄내고 이 시간을 잘 지나가며 조금 더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그리고 그녀가 그 시간을 지나 작가가 된 그녀는 에릭에게 말한다. 당신 없이는 해낼 수 없었을 거야. 그리고 그들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간다. 목표를 이룬 뒤에도 허전해하지 않고 더 다정해진 일상으로.
나는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이고 좋은 것은 주고받으며 함께 성장하는 관계를 꿈꾸기에 줄리아와 폴의 관계를 더욱 원한다. 하지만 사실 나의 수준은 줄리와 비슷하다. 착하고 소심하지만 신경질적인 상태. 나도 묻어둔 꿈이 있고 그것을 실현할 방법은 찾기 어려우며(혹은 준비가 덜됐거나) 상대가 주는 사랑과 도움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거나 제대로 받을 깜냥이 안 되는 때도 있다. 그리고 그런 방식으로 상처를 주기도 한다.
줄리와 줄리아 모두 남편과 함께하는 삶을 우선으로 살아왔고 그를 사랑하기에 선택한 곳에서 자신의 적성을 찾았다. 그 과정에서 좌절하고 꿈꾸고 실천하던 것이 무너지는 때가 있었지만, 그녀들은 다시 자신이 이 일을 시작했던 이유를 떠올리고 주변에 감사하며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에 최선을 다했다. 자신과의 약속을 성실하게 지켜간다. 그리고 그때에 그 곁의 남편들은 그녀들의 꿈이 이루어지는 과정을 함께 지켜보며 응원하는 최고의 관객이자 후원자가 되어준다. 서로가 각자를 위한 시간을 기쁘게 견뎌내고 그것이 자신의 것을 포기하는 것이 아닌, 새로운 꿈을 꾸게 되는 것임을 믿으며 따뜻한 위로가 되어주는 관계. 믿음이란 예상보다 더욱 강해서 나의 예상으로는 될 수 없던 일도 믿음으로 이루어지기도 하는 것 같다. 줄리아는 친구들의 믿음에 힘입어 꼬르동 블루를 졸업할 수 있었고, 폴의 믿음대로 그녀의 책을 알아보고 가치를 인정하는 출판사와 책을 만들 수 있었다. 줄리는 에릭의 믿음대로 그 어떤 친구들보다 더 나은 도전으로 작가가 되었다.
줄리는 줄리아의 부정적인 말에 상처 입었지만 다시 일어나서 말한다. 이전에는 배우며 즐거움을 찾아가는 것을 알지 못했지만, 줄리아가 그 즐거움을 알려주었으며 지금의 자신을 있게 했다고. 그렇게 점차 외부의 비판과 자신의 감정을 분리하게 된다. 그리고 그것을 알게 한 것은 결국 줄리 자신의 결정과 노력이었다. 줄리는 그렇게 감사하며 즐거움을 누리는 법을 배웠다. 스컹크에게서도 장점을 찾아내고 넘어질 때면 다시 시작하다 보면 어디로 가게 될지 알아내게 될 것이라는 희망을 가진 사람이길 바라지만 실상은 사자도 쥐처럼 여기고 넘어질 때면 그냥 엎어져 있고 싶을 때가 더 많다. 내가 아무리 사랑해서 한 일이라도 누군가 비난하면 그게 진실이라 믿어버리기도 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더 나은 관계를 만들어 가야 하기에 더 나은 사람이 되기를 포기하지 않으려 한다. 결국 우리를 구하는 것은 사랑에서 나오는 결정과 노력, 그리고 서로의 믿음이니까.
.
덧,
영화에 사용된 음악들이 다 좋은데, 특히 'Time after time'이 너무 좋다. 가사 있는 것과 연주 버전 모두 자장가처럼 자기 전에 한 번씩 듣게 된다.
그리고 여운이 긴 장면. 엔딩.
예상치 못하게 자신의 책을 보게 돼 너무나 감동받은 줄리아의 표정과 그것을 알고 지켜보는 폴의 표정.
그리고 예쁜 땡땡이 표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