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기억의 포스트 잇

# 성탄절

by 공글

#성탄절_크리스탈 체스 세트


오늘은 2025년 12월 25일 성탄절이다. 2025년의 한 해가 저물어가고 있다. 예전마냥 거리의 캐롤이나 교회의 종소리가 마을마다 울리지는 않지만 번화한 거리에는 연인들의 맞잡은 손과 기대를 품은 눈빛들은 여전히 연말의 크리스마스임을 느끼게 해준다.


유치원, 초등학교 시절의 성탄절은 생일 다음으로 기대되는 명절(?)아닌 명절(?)이었다. 시골의 작은 마을 교회를 다녔기에 평소처럼 한산하던 그 교회가 유달리 시끌벅적하게 사람들이 모이던 때가 바로 성탄절이었다. 사실 교회에서는 성탄절 당일보다 전야, 즉 크리스마스 이브에 더 활기를 띤다. 교회를 다니던 사람들은 삼삼오오 나뉘어진 모임별로 일종의 장기자랑 같은 발표회를 진행하며 성탄을 기린다.


시골에서의 성탄절은 흔히 교회가 주최하는 마을 잔치였다. 평소 교회를 다니지 않는 사람이라도 교회에 와서 떡을 나누고 선물을 함께하기도 했으며 주민들은 교회에 작은 헌금을 했다. 유치부 내지 소년부였던 나는 어른들 틈에 그 교회의 크리스마스 이브의 분위기를 한껏 즐겼다. 지금은 상상하기 어렵지만 크리스마스 이브에는 시골 마을의 꼬마들이 모여서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찬송가를 부르고 사탕이나 과자를 받았다. '새벽송'이라고 했던거 같다. 어찌보면 지금의 할로윈데이때 귀신 분장을 하고 사탕 받는 풍습과 비슷하다. 할로윈데이의 사탕 받는 것보다 교회에서 크리스마스의 새벽송을 돌며 사탕을 받던 기억이 먼저 있던 나는 추운 겨울에 장갑을 끼고 캐롤을 부르며 시골 마을을 쫒아 다니던 기억이 난다.


시골에서 전학을 도시로 간 뒤에도 집에서 가까운 교회를 다녔다. 유치부와 소년부 등에서는 크리스마스를 맞이하기 일주일 전 정도에 교회 활동에 따라 지급되던 달란트(일종의 칭찬 스티커)를 이용해서 시장을 여는 행사가 있었다. 플리마켓이라고 하기에는 모두 새로운 물건들이었으나 일반 상점과 비교하기에는 조금 부족한 느낌의 그런 '달란트 시장'이었다. 나는 나름 성실하게 교회를 다녔던거 같다. 달란트를 그때 많이 모았었고 들뜬 마음을 가지고 5달란트, 10달란트 수십장을 주머니에 꼭 넣어갔다. 헹여나 한 장이라도 흘리지는 않을까 수시로 주머니에 손을 넣어서 만지작거리며 개수를 확인하곤 했다.


달란트 시장은 초등부가 있던 지하 1층 교회에서 진행되었다. 컵떡볶이가 5달란트, 어묵탕이 3달란트, 장난감도 있었고 교회측에서 준비한 여러 물건들이 많았다. 그럼에도 나에게 눈에 띈 것은 하나였다.

'크리스탈 체스 세트'. 물론 진짜 크리스탈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 제일 비싼 가격으로 책정되어 있던 '무언가' 는 내가 사지 못하고 두번째로 비싼게 바로 이 '크리스탈 체스 세트' 였다. 유리판으로 된 체스판에 투명한 백말들, 그리고 반투명한 흑말들이 구성되어 있었다. 나는 지금이나 그때나 숫기가 좀 부족했다. 1년 어쩌면 그 이상이었을지 모르도록 모은 달란트로 사기에도 체스 세트는 비쌌다. 얼마가 부족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5학년의 어린 마음에 그 체스 세트에 눈을 빼았기고 계속 그 주변을 서성거렸나 보다. 다른 친구들은 떡볶이도 사먹고 어묵도 먹고, 장난감 권총도 사고 작은 인형이나 간식도 사갔다. 끼리끼리 모임에 전학을 온 나는 잘 끼지는 못하였다. 학교에서도 아니고 교회에서는 이미 친해진 아이들이 커서 올라왔기 때문에 막바로 전학 온 나는 그런 무리에 속해 있지는 못했었다. 여러 작은 간식들부터 기념품들 하나 하나 매대를 떠났다. 하지만 나는 그런 것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나 보다. 구깃해진 달란트를 만지작거리면서 머뭇대니 당시 체스 세트를 두고 있던 형제(?)님이 가져가라고 주셨다. 나는 가지고 있던 달란트를 다 냈다. 작은 정도가 부족했겠지만 일종의 떨이 상품이 아니었겠는가? 작은 컵떡볶이 하나를 사고 싶기는 했지만 그러지는 못했다. (지금 생각하면 사실, 그냥 달라고 하면 주셨을 분들이다. 나의 숫기가 부족하여 그 말을 건네지 못하였을뿐이라고 생각이 든다.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교회에서 그 아이에게 꼭 달란트를 받고서야 떡볶이를 주기야 했겠는가..) 얼마나 의기 양양 했을까... 그 큰 체스 세트를(가로 세로 40~50센치는 된다.) 가슴에 품고 집에 돌아왔다. 부모님께 자랑도 하고 당장 체스도 혼자서 둬 보았다. '탁탁' 하는 체스 말이 유리에 부닺히는 소리가 어찌도 영롱하던지 자랑할 거리가 생겼다. '우리집에는 유리로 된 체스 있다' 속으로 간직하게 된 말이다.


사실 그 당시에 나는 시골에서 부모님을 따라 도시로 올라왔고 부모님은 정말 작은 음식점을 하였다. 홀도 마땅히 없고 배달을 전문적으로 하며 뒤에 방이 한 두 칸 정도 달려 있는 그런 곳이었다. 당연히 친구들을 정식으로 초대한 적은 없다. 아니 8년 중에 한 번 정도 있다. 친구들과 본격적으로 친해지기 전 그저 옆집 친구였다. 어린 마음에 아마 초대할 생각은 전혀 못했을지도 모른다. 아니 정확하게는 초대하고 싶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의레 그렇듯이 그런 상황에서 부모님의 관계도 썩 좋지는 못했던 시기이기에 누군가를 집에 데려온다는 것이 괜시리 부모님에게 신경 쓸 일을 하나 더 던져주는 느낌이었다. 그때는 그랬던거 같다. 그러니 자랑할 만(물론 딱히 부러워 하거나 그러지도 않았지만...)한 것도 없었고 그저 다녔다.(그렇다고 왕따나 그런것은 아니었다. 핸드폰도 없었어서 순수하게 재미있게 친구들과 학교에서 지냈다.)

그러니 이제 자랑할 것이 생긴 그 어린 마음이야 얼마나 기뻤을까. 그 크리스탈 체스 세트는 지금도 가지고 있다.가끔 사촌들이 오거나 하면 아직도 종종 꺼내서 하곤 했다. 물론 이제는 체스 말의 아랫 부분에 유리끼리 부딪혔을때 깨지거나 소리가 나지 말라고 붙혀둔 검은색 부직포들이 너덜너덜해지거나 아예 떨어져 나간것도 많고 전체 세트를 감싸던 스티로폼(나름 안전한 포장법이었다.) 박스는 군데군데 구멍과 바스러진 곳들 투성이다. 그럼에도 가끔 퀸이나 킹의 그 오묘한 조각을 보며 그때의 감정이 생각이 난다. 무엇이 그리도 좋았을까

臺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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