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밤에 비빔국수가 먹고 싶었다. 이 시간에 문을 열어둔 국숫집은 없기에 어쩔 수 없이 직접 만들어야만 먹을 수 있었다. 비빔국수야 뭐 만들기는 간단하니까 만드는 건 문제가 되지 않지만 정작 문제는 피곤함과 귀찮음이었다. 소면도 없어 사러 나가야 했다. 그냥 이대로 잠들면 괜찮지 않을까 했지만 머릿속에는 ‘비빔국수 먹고 싶다’가 계속 맴돌아 나를 괴롭혔다.
한 시간 정도 씨름하다 결국 비빔국수를 뱃속에 밀어 넣기로 결정했다. 계속 고민하고 참으며 잠을 못 자는 거보다 잠깐 귀찮음을 무릎 쓰고 비빔국수의 만족과 편안한 잠을 얻겠다는 나름 합리적인 변명이었다
근처 마트는 새벽까지 문을 여는 가게라 부담 없이 갈 수 있었다. 소면과 애호박을 사고 맥주도 하나 사서 돌아왔다. 냄비에 물을 올리고 애호박을 채 썰고 물이 끓으면 소면과 채 썬 호박을 넣었다. 물이 보글보글 올라와 넘쳐흐르려고 하면 찬물을 한 컵 넣었다. 이걸 두세 번 하면 국수는 딱 알맞게 익는다. 남은 소면은 천장에 올려두고 남은 애호박은 냉장고에 넣어두었다. 삶은 국수는 채에 담아 잘 씻어 냄비 위에 잠깐 올려두면 됐다. 기왕 먹는 거 만두도 먹고자 했다. 프라이팬에 만두를 올리고 올리브유와 물을 붓고 가열시켜놓으면 만두가 알맞게 익는다. 그 사이 비빔국수 양념장을 만들어 놓으면 된다. 양념장을 다 만들고 그냥 습관처럼 찬장 문을 한 번 열었는데 아뿔싸 올려두었던 소면이 와르르 쏟아져 내리고 말았다. 싱크대며 선반에 올려둔 그릇이며 할 거 없이 소면으로 엉망진창이 돼버렸다.
억울한 마음과 짜증이 솟구쳤다. 대체 내가 뭘 잘못했다고 이러는 건지, 난 그저 비빔국수가 먹고 싶었는데, 먹고 싶은 것만 얼른 먹고 잠에 들려고 했는데, 나는 대체 왜 이 모양인가 싶었다. 독립한 지 1년이 넘었지만 이런 실수를 할 때면 벌써 형이나 엄마가 듣기 싫은 소리를 하고 있는 듯 한 기분마저 들곤 한다.
한 가지 다행인 건 예전보다는 이 짜증이나 억울한 마음이 폭발하듯 올라오지 않는다. 예전 같았으면 쏟아진 국수를 보며 혼자 욕 짓거리를 내뱉으며 아무 잘못 없는 소면이나 다른 곳에 화풀이를 했을 텐데 지금은 ‘나한테 왜 이래?’ 같은 자조적인 혼잣말만 하고 주섬주섬 소면을 담을 수 있게 됐다는 거다. 그리고 나에게 ‘괜찮아’라고 말할 수 있게 됐다는 거다. 쏟아진 소면은 짜증 났지만 감정이 잔잔하게 흘러가고 있는 내 모습을 보니 내심 나도 커가고 있구나를 느낄 수 있었다.
소면을 주섬주섬 담다가 만두가 다 익어가고 있어 그만두기로 했다. 일단 지금은 맛있게 먹고 다음날에 정리하면 괜찮을 거 같다는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