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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영태 Feb 02. 2020

그런 말을 할 수 있다는 건

산책을 나가면 가끔 성모당으로 향합니다. 수명이 다 된 형광등처럼 삶이 깜박거리곤 할 때, 성직자들의 무덤이나 마리아상 앞에 멍하니 있다가 주위를 걷는 걸 좋아합니다. 조용한 바람 소리에 잎사귀가 떨리는 소리를 듣고 있으면 삶의 무게가 조금 덜어내지는 듯합니다.  


 언젠가 마리아상 앞에 있었을 때 한 할아버지를 본 적 있습니다. 올려다본 하늘은 적막했고 시야에 닿는 건 앙상한 나뭇가지와 알 수 없는 불안감뿐이었고, 시간은 흐릿했으며 땅바닥을 뒹구는 나뭇잎이 나비가 되어 날아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때였습니다. 지팡이를 짚고 있던 할아버지는 느릿하고 조심스럽게 마리아 상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지팡이 끝이 땅에 닿을 때마다 적막은 얼음이 부서지듯 깨졌습니다. 할아버지는 마리아상 앞에서 지팡이를 내던지고 무릎을 꿇었습니다. 어딘지 모르게 굳건해 보여 의식의 한 장면 같아 보였습니다. 기도하는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자니 괜스레, 옆에 있고만 싶어 졌습니다.


 기도는 삶을 지탱하는 부분이라 생각합니다. 도저히 견딜 수 없을 일에 맞부딪히거나 간절히 무언가를 이루고 싶을 때 두 손을 모은다 생각합니다. 기도의 종류는 저마다 다르겠고 기도의 대상이 다르더라도 말입니다. 간절히 살아가기 위해서 두 손을 모으는 것. 그러니 나 역시도 가끔 성모당에서 봉헌초를 올리고 기도를 드리곤 합니다. 신을 믿지 않는데도 말입니다.      


 심장이 멎는다면, 나는 사라질 수 있길 바란다고 소원을 빈 적 있습니다. 기억은 살아있는 사람만 가지고 있어도 충분하고 상처는 떠나간 사람이 가지고 있기에는 잔혹하니 말입니다. 천국도 싫고 지옥도 싫어서 그저 사라질 수 있기를 바랐습니다. ‘죽고 나면 아무것도 없으면 좋겠다.’ 이 말을 언젠가 우울의 깊이가 비슷한 사람에게 건넨 적 있습니다. 그 사람은 말했습니다. 같은 생각이라고. 항상 죽음을 생각하고 있다고. 삶은 살아가는 게 아니라 살아내고 있는 거라고. 우리는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청년들의 영정사진을 찍어주는 일을 도와준 적 있습니다. 취미로 사진을 찍는 모임에서 공모사업에 선정돼 전시회를 준비하던 와중이었습니다. 박람회에서 부스를 차리고 오는 사람들의 사진을 찍고 인터뷰 영상을 남겼습니다. 카메라도 없고 사진 기술도 변변치 않았던 저는 설문지를 작성하고 참가자들의 인터뷰를 준비하고 작성된 설문지를 정리하는 허드렛일을 했습니다.


 영정사진은 젊은 사람과는 거리가 멉니다. 주로 나이 드신 분들이 마지막을 준비하고 자신의 인생을 찬찬히 돌아보고자 할 때 촬영하는 거니 말입니다. 아무래도 젊은 사람들이 영정사진을 찍는다는 건, 여러모로 좋지 않게 보일 수 있으니 조심스러웠지만 죽음을 생각함으로써 살아갈 힘을 얻어낼 수 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설문지에서 가장 애착이 갔던 질문은 ‘어떤 모습으로 기억되고 싶나요?’였습니다. 떠나간 이는 남아있는 사람의 기억에만 있고 씁쓸하게도 잘 살았는지 못 살았는지는 사람의 기억에 달려있으니 말입니다. 사람들은 답했습니다. 재미있는 사람, 꼭 필요했던 사람, 행복하고 싶었던 사람, 서툴러도 재밌었던 사람, 가끔 생각나는 사람, 적혀있는 이야기를 읽다 눈시울이 붉혀졌는데 결국 한 부분에서 눈물을 쏟고 말았습니다. 


 빨리 잊혀지고 싶다는 사람과

 희미하게 잘 잊혀지면 좋겠다는 사람


 사람들에게서 잘 잊혀지길 바란다는 사람은 세상을 다정히 바라보는 사람이라 생각합니다. 나의 아픔보다 다른 이의 아픔을 아파하고 본인 역시도 사람에게 받은 상처가 많지만 누구에게 잘 풀어내지 않고 혼자 미련하게 안고 가는 사람이라 생각합니다. 나는 무엇보다 내가 우선이라 그런 사람들을 마주하고 있으면 마음 한편이 저릿해지고 부끄러워서 숨고 싶어집니다. 나는 기억됐으면 좋겠고, 나를 미안했으면 좋겠고, 좋게 생각해줬으면 좋겠다는 말만 할 수 있는데 말입니다.


 사람들에게서 잊혀지기는 싫으나 나는 사라지면 좋겠다는 소원은 이기적이기만 합니다. 비겁하고 도망치기만 해서 사람들이 가질 상처는 외면하고 내가 받을 상처는 피하고 싶은 마음만 가득합니다. 무엇보다 살아낼 마음이 기진맥진할 때 비는 소원이니 누구에게도 좋을 게 없는 소원입니다  


 오늘도 성모당에 다녀왔습니다. 비가 왔고 여전히 한적하기만 길을 걸어 성냥불을 켜고 초를 밝혔습니다. 여전히 사라질 수 있길 바란다는 기도를 담았으나 소원의 말미에는 살아갈 힘을 얻게 해 달라고도 빌었습니다. 언젠가 나 역시도 잘 잊혀지길 바란다는 말을 할 수 있게 말입니다. 이 소원만은 이루어졌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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