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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영태 Sep 07. 2020

청년활동가의 변명이거나 항변이거나

청년활동가라면 누구를 대변하고 있는 걸까. 만약 이런 질문을 누군가에게 하게 된다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당연히 ‘청년’이라고 답할지도 모르겠다. 이름 그대로 청년활동가이니 말이다. 그렇다면, 청년활동가는 청년 전체를 대변한다고 해야 할까.


 “너는 어떤 청년을 위해 목소리를 내고 있니?” 


 심심치 않게 듣는 질문이다. 나는 말한다. 


 “저는 저와 같은 사람들을 위해 목소리 내고 있어요.”


 일자리문제, 노동인권문제, 창업문제, 주거문제, 결혼문제, 육아문제 등 청년문제가 빠지지 않는 곳은 없다. 이중 한 분야라도 목소리가 약하면 온갖 비판이 날아온다. 이 분야에 대해 말하지 않을 거면 ‘청년’에 대해서 논하지 말라는 언성 높은 이야기도 포함해서 말이다. 


 사실 나는 이렇게 이야기하고 싶다. ‘청년활동가’라고 모든 청년문제에 대해 관심가지고 대응할 수는 없다고, 한 개인이 또는 한 집단이 대응하기에는 청년문제는 범위가 너무 넓다고, 그러니 다양하고 많은 청년활동가들이 세상에 나와 각자가 처한 상황에 대해 목소리를 내면 되는 거 아니냐고 말이다. 


 애당초 ‘청년’은 무엇일까. 청년이라는 세대를 단순히 통일된 한 세대로 규정해도 괜찮을 걸까. 대학생인 청년과 대학생이 아닌 청년, 안전하고 소득이 높은 곳에서 일하는 청년과 위험하고 소득이 낮은 곳에서 일하는 청년, 공무원을 준비하는 청년과 취업준비를 하는 청년, 창업을 준비하는 청년, 젠더로 나뉘는 청년을 하나로 규정해도 되는 걸까? 이들의 삶은 명확히도 다른데 말이다.


 ‘나’라는 사람이 겪어온 삶과 타인이 겪어온 삶은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겪어보지 않은 삶에 대해서 정확히 이야기할 수 없다. 그러니 나는 내가 겪어 온 청년의 삶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누군가는 그들이 겪어 온 청년의 삶을 이야기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니 나는 내가 겪었고 자신 있게 목소릴 낼 수 있는 분야에 대해서 이야기하려고 한다. 다른 분야가 중요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나의 한계가 여기까지니 말이다. 청년활동가가 모든 걸 해결하는 게 아니라 다양하고 많든 청년활동가들이 자신의 분야에서 목소리 낼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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