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안가를 따라 차분히 걷는다. 저 멀리엔 개와 함께 뛰어노는 여자가 보인다. 내가 생각하는 행복보다 더 자연스럽고 근사해 보인다. 저렇게 간단하게 기쁠 수 있는 사람은 축복받은 게 분명하다. 학습이나 반복으로 이뤄낼 수 없는 행동이다. 그러나 몇 년 전을 떠올리면 나도 저것 비슷하게 자연스럽게 웃을 수 있는 괜찮은 사람이었지. 일부로 기분 좋은 에너지를 발산하지 않아도 그 사람과 함께 있으면 그 분위기에 휩쓸려 어느새 웃고 있는 내 모습에 조금은 놀랐었다.
‘아버지, 당신이 얘기한 성공보다 훨씬 근사한 게 여기 있네요.’
난 항상 무언가를 쌓으려 하고 거기서 뚜렷한 결과가 나오지 않으면 의미 없는 짓이라 단정하며 살았었다. 하지만 뭐랄까, 젠가처럼 높이 올라가는데 갈수록 마음 밑바닥은 위태로운 기분. 근데 그녀와 있을 땐 왠지 그런 게 전혀 신경 쓰이지 않았다. 심지어 오븐에 넣어둔 음식을 잊고 그녀와 외출하고 한참 뒤 집에 돌아오면 그것마저 우릴 위한 새하얀 연기로 가득 찬 즐거운 이벤트같이 느껴지기도 했어. 우린 그 아담한 주방에서 웃으며 까맣게 타버린 오븐을 서로 정리하라고 미뤘었지. 뭐 결국 항상 같이 했었지만. 그런데 내가 어렸을 때 누군가 오븐을 태운 적 있었는데 어떤 가정부가 해고됐어. 사실 고작 어린아이였을 뿐인 나의 장난이었는데 아무도 웃지 않았어. 오히려 가정부는 울면서 자기 짐을 싸더라. 사람이 조용히 울 수도 있다는 사실을 그때 처음 알았어. 죄책감에 쌓여 겁먹은 나는 그걸 아무에게도 얘기할 수 없었다. 이튿날 가족 저녁 식사 자리에서 울먹이며 어머니에게 그 얘기를 하니까 아무 대꾸 없이 내게 미소만 짓다가 메스꺼운 표정으로 돌변해서 느닷없이 아버지에게 그러는 거야.
“그 여자랑 잤지?”
아버지는 그 얘기를 듣자마자 조용히 냅킨으로 입가를 닦고 식사 자리에서 일어나시더라. 그리고 주방을 나가기 전에 내 머리를 헝클어트리면서 쓰다듬었어. 그리고 내게 웃으며 말했어.
“잘했어. 아들.”
난 아직도 뭐가 잘했는지 모르겠어. 그러나 저녁식사 후로 그 사건을 다시 입에 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어. 그 뒤로 오븐을 만진 적은 아마 이번이 처음일 거야. 아무튼 오븐을 태우는 이런 당혹감도 그녀와 나누면 신기하게도 웃어넘겨버렸었어. 굳이 필요 없는 폴라로이드 사진기를 사서 이런 일상을 남기다 보면 세상에서 우리만큼 특별한 커플은 드물다고 착각할 정도였지.
회상에 빠져 넋 놓고 있다가 어느새 개가 내 다리 주변을 돌며 첨벙첨벙 뛰어놀고 있는 것을 본다. 바닷물이 얼굴까지 튄 후에야 모든 상황을 인지했다.
낯선 그녀가 황급하게 개를 뒤따라오며 내게 말한다.
“죄송해요! 워낙 활발한 얘라.”
젠가가 무너진다.
처음 왔던 파도는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하지만 어떤 파도는
마음 밑바닥에 영원히 스며들어 절대 증발하지 않는 것이다.
그녀, 오븐, 엄마, 가정부, 아빠, 소년이었던 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에게 학습을 받은 듯 나도 모르게 낯선 그녀를 보고 웃는다.
“괜찮아요. 다.”
이런 당혹감도 신기하게도 웃어넘겨버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