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케아X버질 아블로 콜렉션이 시사하는 점
작년 말 IKEA x 버질 아블로 협업 콜렉션이 밤샘 대기열마저 생길만큼 인기몰이를 해서 꽤 화제가 됐었다. 홍대나 압구정의 나이키 매장 앞에서나 볼 수 있던 부산스런 광경을 가구점 앞에서도 보게될 날이 오다니..
2000년대까지만 해도 잘 나가는 건축가들이 리빙이나 패션 브랜드로부터 러브콜을 받는 일이 꽤 잦았다. 최고의 브랜드들은 건축가와의 협업으로 이미지의 외연을 넓히고자 했다. 반면에 최고의 건물을 지으려는 사람들은 딱히 패션 디자이너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패션은 줄곧 갇힌 영역이었고 씬 안의 영향력은 좀처럼 바깥에 나가지 못했다. 그런데 지난 십년간 그런 암묵적 룰이 완전히 뒤집어지고 있다. 세계 최대의 공간 브랜드인 이케아와 더불어, 올 한 해 버질과 밀도 있는 콜라보를 진행했던 리모와나 에비앙도 모두 패션 브랜드가 아니다. 무엇이 달라졌는가?
예술 운동이 한창이던 시절 아방가르드 미학이 가장 먼저 현실로 데뷔하는 무대는 늘 건축이었다. 거기서 시도된 새로운 방법론은 스케일이 작고 회전이 빠른 분야(가구, 제품, 패션 등)로 전파되곤 했다. 모든 분야를 통틀어 가장 느리고 비싼 제품인 건축은 태생적으로 엘리트중심적인 시장을 가졌고, 건축주만 잘 만난다면 한 없이 자유로운 창작의 실험대가 될 수 있었다. 디자인사 교과서의 선구자 중에 유독 건축가가 많은 건 우연이 아니다.
문제는 정보화가 발달하고 초연결 사회에 다가갈수록 사람들의 사고의 길이가 짧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컨텐츠가 범람하는 속도에 비하면 소비 인구는 거의 그대로에 가깝고, 잘게 파편화된 이미지들의 게릴라성 소비가 사람들의 여가시간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게 되었다. 그럴수록 건축 같이 느리게 생산되는 컨텐츠는 소외될 수 밖에 없다. 전공자 아니면 평생 볼 일이 없는 건축 잡지는 창간과 폐간을 밥먹듯이 하고 졸업생 중 과반수는 학과를 잘못 선택한걸 후회하며 탈건축을 한다. 과거엔 너무 빨라 스스로 파편화를 반복하던 패션은 자연스레 가장 영향력 있는 소비 컨텐츠 중 하나로 자리잡을 수 있었다.
패션이 새로운 권력을 가지게 된 것도 이 때부터가 아닌가 싶다. 패션의 논리는 이미 사람들의 삶 속의 면면에 스며들어 변화의 동력이 되고 있고, 이젠 건축과 공간의 영역에서도 그런 현상이 관찰 된다. 패션 디자이너의 이름을 전면에 내세우는 공간 브랜드의 마케팅이 성공적일 수 밖에 없는 이유다.
202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