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IR-2.1] 기업혁신과 융합-1
4차 산업혁명을 ‘신기술이 촉발하는 거대한 변혁’이라고 볼 때, 그와 같은 변혁에 대처하기 위해 개인, 기업, 국가, 사회, 인류가 준비해야 할 일은 한 마디로 혁신(innovation)이다. 그동안 ‘4차 산업혁명 크게보기’라는 주제를 12개의 시리즈 글로 정리한 데 이어 당분간 ‘기업혁신과 융합’에 대해 정리하고자 한다. 여기에서 ‘기업(enterprise)’은 기능적 공생(共生, functional symbiosis)을 추구하는 개체들의 집합을 가리키는 것으로 영리 목적의 회사(company)와 비영리 단체/기관이 모두 포함된다.
필자가 주장할 일관된 메시지는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맞이할 가장 효과적 정책/전략이 바로 융합(convergence)’이라는 것이다. 다만, 융합은 종래의 혁신과는 다른 특성을 가진 신개념의 혁신(경영)이기에 기존 방식을 유지할 부분도 있고 새로운 방식을 도입, 적용할 부분도 있다. 우리나라는 미국, EU 등이 2000년대 초반에 본격 착수한 융합이라는 혁신을 지난 15년여에 걸쳐 열심히(?) 추진해 왔다. 융합은, 지난 글(예: 4차 산업혁명과 융합)에서 주장했듯이, 클라우스 슈밥과 WEF의 ‘4차 산업혁명론’에 비해 여러 가지 점에서 결코 부족하지 않은 혁신 프레임워크라는 점을 강조하고자 한다.
혁신은 누구에게나 익숙한, 그러나 이 주제를 연구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정작 깊게 생각해 보지는 않은 단어일 것이다. 어원을 따져보면 革新이란 한자는 ‘이미 가공한 가죽을 더 새롭게 만든다’, Innovation이란 영어는 ‘안에서부터 시작해서 새롭다’는 의미라고 한다(http://www.crevate.com/insight/혁신이란-무엇인가/). 중요한 것은 혁신은 왜, 무엇을, 어떻게 하는 것인가? 같은 질문에 대한 답일 것이다. 이번 글에서는 혁신의 목적(why), 대상(what), 방법(how) 등을 중심으로 그 의미를 되새겨 보고자 한다.
혁신은 학문적으로는 경영/경제, 산업공학, 정보시스템 등 여러 분야에서, 또 전 세계의 모든 산업 현장에서 오랜동안 다루어 온 주제지만, 관점이나 초점에 따라 달리 정의되고 있어서 공통의 언어로 설명하기 어려운 주제이다. 특히, 혁신에 대한 기존 논의는 대부분 특정 기업의 활동, 그중에서도 기술(technology) 중심의 활동을 다루어 왔는데 어느 시기부터인가 그 범위가 기업생태계와 산업, 국가, 그리고 비기술(non-tech) 활동 등으로 확장되었기에 더더욱 어렵다. 실제로, Edison et al.(2013)은 2010년까지 발표된 200여 개의 논문에 혁신에 대한 41개의 서로 다른 정의가 존재하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융합이나 4차 산업혁명 대응을 담을 수 있는 포괄적 프레임워크가 필요하다. 공동의 비전을 설정하고 명확한 의사소통을 통해 실질적 협력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문제 풀이’에 앞서 ‘문제 정의’가 이루어져야 한다.
우선, 여러 학자/전문가들의 혁신에 대한 정의를 살펴보자. 혁신경제, 기업가정신 등으로 유명한 조지프 슘페터는 1930년대에 혁신을 ‘새로운 조달/납품, 생산, 판매, 경쟁 방식’으로 정의하였고, 경쟁전략, 기업의 사회적 책임/공유가치창출(CSR/CSV) 등으로 유명한 마이클 포터는 1980년대에 혁신을 ‘기존 제품, 공정, 마케팅, 유통 방식의 개선’으로 정의하였다. 영국의 컨설턴트인 맥스 맥케온(McKeown)은 2008년에 혁신을 ‘사물, 생각, 진행 상황, 서비스에서의 점진적/급진적 변화’로 정의하였다. 유럽 표준기구인 CEN은 2013년에 혁신을 ‘새롭거나 획기적으로 향상된 제품/서비스나 공정, 새로운 마케팅 방식 또는 조직 방식을 구현하는 것’이라고 하였다(CEN/TS 16555-1, Innovation Management, 2013).
혁신에 대한 종래의 정의는 현시점에서는 여러 가지 불명확 또는 불충분한 점이 있다. 즉, 그들은 대부분 혁신의 목적(why)은 새로운 가치 창출, 혁신의 대상(what)은 제품/서비스의 조달-생산-유통 등 기업 가치사슬 활동으로 규정하고 있고, 혁신 방법(how)은 속도(예: 급진적, 점진적)나 수준(예: 개선, 대체, 파괴)에 따라 달라진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제 ① ‘가치’는 누구의 가치이며, ② ‘혁신 대상’을 특정 기업의 내부 활동으로 국한해도 되는 것인지 ③ 혁신의 성과는 누가, 어떤 기준으로 평가할 것인지 ④ 속도나 수준 외에 혁신 성과를 차별화할 새로운 ‘혁신 방법’은 무엇인지 등이 추가로 고려되어야 한다.
대략 1980년대 말부터 시장 권력은 생산자로부터 소비자로 이전되었기에 ‘가치’도 기업가치(예: 매출/이익, 시장점유율)보다는 소비자/고객가치를 중시해야 한다. 기업활동의 범위가 글로벌화되고 기업 간 경쟁이 기업생태계간 경쟁으로 전환되었기에 혁신 대상도 확장되어야 한다. 사회/환경/종업원에 대한 기업의 책임 즉, 지속가능성(sustainability)이 중시되고 있기에 혁신 성과는 개별기업, 기업생태계, 사회/지역/국가, 인류 차원에서 평가되어야 한다. 2000년대 이후, 등장한 새로운 기술과 제품/서비스는 대부분 서로 다른 지식/기술/경험의 교차점에서 촉발된 것임을 감안하다면 기술, 경제, 사회 등 모든 영역에서 융합을 가장 중요한 혁신 수단으로 삼아야 한다.
한편, 1980년대 말쯤 혁신 대상을 기업/산업을 넘어 국가 전체로 확장한 국가혁신시스템(NIS: National Innovation System)이란 개념이 등장하고, 1990년대 이후, 인터넷을 포함한 IT 발전과 소비자 행태 및 시장 변화에 따라 사용자(user) 혁신, 사회적(social) 혁신, 협업적(collaborative) 혁신, 저기술(low-tech) 혁신, R&D 없는(non-R&D) 혁신 등 새로운 개념의 혁신이 제시되었다. 그 외에도 전략적 혁신, 디자인 혁신, 서비스 혁신, 비즈니스 프로세스 혁신, 비즈니스 모델 혁신(BMI: Business Model Innovation) 같은 새로운 용어/개념이 등장하였다. NIS는 국가 내의 여러 혁신 주체 즉, 기업, 정부, 교육기관, 연구기관, 투자/지원기관 등과 이들 간의 상호작용을 포함하는 시스템이다. 이후, 별도로 명시하지 않는 한, ‘혁신’은 기업혁신을 가리킨다.
기업혁신은 크게 보면 과정(process) 또는 대상(즉, 결과물)의 특성에 따라 아래와 같이 분류할 수 있다. 각각의 의미는 차후에 소개할 것이다.
o 영역이 내부인지 내부+외부인지에 따라 폐쇄형(closed), 개방형(open)
o 진행 속도에 따라 점진적(evolution), 급진적(revolution)
o 진행 방향에 따라 하향식(top-down), 상향식(bottom-up)
o 의사결정 계층에 따라 전략적(strategic), 전술적(tactical), 운영(operation)
o 누가 주도하는지에 따라 생산자, 사용자(user)
o 대상에 따라 제품, 서비스, 비즈니스 모델, 조직, 마케팅, 경영, 비즈니스 프로세스, 품질
o 결과물의 수준에 따라 지속적(sustaining), 구조적(architectural), 파괴적(disruptive)
o 수단에 따라 기술(technical)/비기술(non-tech)
2000년대 초반부터 가속화된 융합은 고객/소비자를 넘어서 사회/국가/인류 차원의 가치를 구현할 것을 목표로 한 혁신이고, 그 대상이 기술(예: NBIC 융합기술)에서 시작해서 제품/서비스(예: 스마트폰)를 넘어 산업(예: 의료관광, 스마트시티), 사회(예: 시민참여형 혁신)로, 또 개별기업을 넘어 기업생태계로 확장된 혁신이다. 융합에 수반되는 혁신방법은 혼자가 아니라 함께 하는 개방형 혁신이다. 융합은 하나의 지식/기술을 하나에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개의 지식/기술을 적용해서 하나의 제품/서비스/솔루션을 만들고(즉, 수렴 과정) 그것을 여러 곳에 활용함으로써(즉, 발산 과정, 이를 One-Source-Multi-Use라고 함) 이해관계자가 나눌 수 있는 가치를 키운다. 예를 들면, 2013년 11월 EBS를 통해 처음 방영된 TV용 애니메이션 뽀로로는 여러 기업이 함께 기획-제작한 후에 캐릭터, 완구, 테마파크 등의 상품으로 판매되어 커다란 가치를 창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