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IR-2.3] 기업혁신과 융합-3
혁신(innovation)은 지난 글에서 언급한 것처럼 목적(why), 범위 또는 대상(what), 방법(how) 등에 따라 여러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국가 차원의 기업혁신 수준 측정에 대한 지침서인 오슬로 매뉴얼(Oslo Manual)(OECD & Eurostat, 2005- 제3판)은 기업혁신을 제품혁신, 공정혁신, 조직혁신, 마케팅혁신 등 4가지로 구분하고 있다. 참고로 우리나라 과학기술정책연구원(STEPI)이 2010년부터 조사, 발표하고 있는 기업혁신지수(CII: Company Innovation Index)도 이를 준용하고 있다. 제품혁신과 공정혁신은 기술혁신(technology innovation)으로, 조직혁신과 마케팅혁신은 비기술(non-tech)혁신으로 분류된다. 제품혁신(product ~)은 기술규격, 부품/자재, (제품에 포함된) SW, 사용자 친근성, 기타 기능적 특성 등을 개선하는 활동이다. 예를 들면, 나노 반도체를 이용해서 제품의 크기를 줄이거나 용량을 늘린다든지, 가솔린 자동차의 연비를 높이는 활동이 여기에 속한다. 공정혁신(process ~)은 품질이나 생산성 향상을 위해 기존 방식보다 개선된 서비스를 생산-제공하는 활동이다. 예를 들면, GPS나 RFID를 이용해서 수송 중인 화물의 위치를 추적한다든지 제조실행시스템(MES: Manufacturing Execution System)을 이용해서 제조공정을 모니터링, 제어하는 것이 여기에 속한다.
조직혁신(organizational ~)은 (조직) 관리비용, (제품/서비스) 거래비용, 소모품/자재비용 등을 줄이고 작업자 만족도와 노동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업무방식, 작업조직, 외부관계 등을 개선하는 활동이다. 예를 들면, 인터넷/웹 기술을 적용해서 상거래와 협업을 전자적으로 수행하는 e-비즈니스 도입, 수평적 기업문화 조성 등이 여기에 속한다. 마케팅 혁신(marketing ~)은 매출액이나 시장점유율을 높이기 위해 제품의 속성, 디자인/패키징, 가격, 유통채널, 판촉(방식) 등을 개선하는 활동이다. 예를 들면, 가구제품의 외관이나 화장품의 병 모양을 바꾸는 것, 백화점이 온라인 쇼핑몰을 오픈하는 것, 항공사가 항공권의 가격을 구매시기별로 달리 책정하는 것 등이 여기에 속한다.
혁신은 오랜동안, 제품 또는 제조공정에 공학/자연과학 기술을 적용한 혁신 즉, 기술혁신을 의미했다. 예를 들면, 제품혁신은 기계적/전기적/화학적 특성이 향상된 소재를 사용함으로써 제품을 경박단소(輕薄短小)화 즉, 가볍고, 얇게, 짧고, 작게 만들어서 기업가치(예: 매출/이익, 시장점유율)와 고객/소비자가치(예: 기능/성능, 이용편의성, 가격)를 높이는 식으로 진행되어 왔다. 공정혁신은 컨베이어 벨트(1800년대 말에 등장), 컴퓨터(1945년), OR(Operations Research)과 시뮬레이션(1950~1960년대), 산업용 로봇과 설계/제조자동화(CAD/CAM)(1960년대), PLC와 컴퓨터 통신(1969년), MRP나 TQC 지원 SW(1970~1980년대), 인터넷(1994년), 스마트폰(2007년) 등 신기술을 활용해서 자재/부품의 조달/구매, 가공, 조립, 시험 등에 소요되는 시간/비용을 줄이는 식으로 발전해 왔다. 제품혁신이 'what to do?'의 문제라면, 공정혁신은 ‘how to do?'의 문제인 셈이다. 참고로 PLC(Programmable Logic Controller)는 간단한 SW를 이용해서 장비를 제어하는 장치를, MRP(Material Requirements Planning, 자재소요량계획)는 제품 생산계획과 생산에 필요한 자재의 재고, 주문량과 주문시기 등을 통합관리해 주는 기법/SW를, TQC(Total Quality Control, 종합적 품질통제)는 통계 기반의 품질관리 기법을 가리킨다.
기술혁신의 동력인 기술은 내부에서 개발하거나(: 폐쇄적 R&D), 외부 즉, 국내/외 산학연과 협력해서 개발하고(: 개방적 R&D), 이미 개발되어 있는 것을 기술료(license)를 지불하고 구매-사용하거나(: 기술도입), 필요한 기술을 보유한 업체와 전략적 제휴/협력, 인수/합병(M&A, A&D), 공동개발(예: C&D) 등을 통해 확보한다. Cisco, Microsoft 등이 구사했던 A&D(Acquire & Develop, 획득개발)는 기술을 buy-in 해서 내부에 유지하는 전략임에 반해, P&G(프록터앤갬블)를 元祖로 꼽고 있는 C&D(Connect & Develop, 연결개발)는 내/외부 기술을 공유하는 전략인 점에서 차이가 있다.
1980년대 말쯤부터 시작된 정치, 경제, 사회 변화는 혁신환경도 변화시켰다. ‘5세대 R&D’로의 전환을 주장한 Rogers(1996)는 1990년대의 혁신환경 변화를 5가지 즉, 정보에서 지식으로, 계층구조에서 네트워크로, 훈련/개발에서 학습으로, 지역/국가에서 초(trans)국가로, 경쟁에서 협업(collaboration)으로의 변화로 설명하였다. Rogers는 그와 같은 환경 변화에 따라 R&D의 초점도 기술혁신(1세대), 제품/공정 혁신(2~3세대), 신시장/산업 창출(4세대)을 넘어 새로운 지식의 창출과 활용(5세대)으로 전환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영국 혁신경영 전문가인 Tidd와 Bessant 교수(2009)는 2000년대 이후의 혁신환경 변화로 지식 생산-유통의 가속화와 글로벌화, 시장의 세분화/가상화, 능동적 사용자/소비자 증가, 기술적/사회적 인프라 발전 등을 꼽았다. 1980년 이후 나타난 혁신환경 변화는 대부분 ICT 발전에 기인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1980년대 초 개인용 컴퓨터가 보급되고 PC 통신이 확산되었으며, 1990년대 중반, 인터넷 상용화에 따라 시간과 공간의 제약이 줄어든 상거래와 협업이 가능해졌다. 1980년대에 등장, 발전한 유비쿼터스 컴퓨팅/네트워킹 기술('u-IT')은 관심 있는 개체들(예: 소비자, 제품, 설비)이 ‘상시 연결되어 (그 상태나 위치를) 상시 인식할 수 있고 필요시 적합한 작업을 실행(지시)할 수 있는(always connected/ aware/ active)’ 기업환경을 만들었다. 사물인터넷(IoT)은 u-IT의 연장선에 있는 기술이다.
이와 같은 혁신환경 변화에 따라 목적, 대상, 방법 측면에서 새로워진 여러 가지 신개념 혁신이 등장하였다. 혁신 목적 측면에서는 실무자의 일상적 작업(operation)이나 특정 사업/부문 차원이 아니라 전사 차원의 경쟁력 강화를 위해 최고경영진이 주도하는 전략적 혁신이 등장하였다. 혁신 대상 측면에서는 有形이 아닌 無形의 가치에 초점을 둔 서비스 혁신, 국부적(局部的) 기능보다는 전체적 조화나 심미성(審美性)을 강조하는 디자인 혁신, 경영관리/사무 활동에서 시간적 지체나 끊김으로 인해 나타나는 비효율을 제거하기 위한 비즈니스 프로세스 혁신(예: BPR, BPI)과 이를 생산공정에 적용한 프로세스 혁신/개선(예: 식스 시그마, TQM), 사업 방식의 일부 또는 전부를 개선하는 비즈니스 모델 혁신(BMI: Business Model Innovation) 등이 등장하였다. 혁신 방법 측면에서는 기업이 아니라 제품/서비스의 소비자/사용자가 주도하는 사용자(user) 혁신,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해관계자들이 참여하는 사회적(social) 혁신, 충분한 자본과 고객기반을 갖추고 있지만 몸집이 무거운 대기업과 특화된 기술력과 기민성(agility)은 갖추고 있지만 자원과 사업화 경험이 부족한 스타트업/벤처기업이 윈-윈 하기 위한 협업적(collaborative) 혁신, 고비용을 부담하기 어려운 시장/소비자를 대상으로 적정기술(appropriate tech.)을 활용하는 저기술(low-tech) 혁신, 고비용, 장시간, 고급인력 등이 필요한 R&D 자체를 외부에 의존하는 non-R&D 혁신 등이 등장하였다. 이상에 소개한 신개념 혁신은 대부분 기술, 특히 자연과학/공학에 입각한 HW 기술이 아니라 경영학을 포함한 사회과학과 문화예술, 그리고 SW를 필요로 하는 비기술혁신에 속한다.
융합은 이질적 지식/학문을 창의적으로 결합해서 새로운 기술과 제품/서비스, 신산업을 창출함으로써 소비자/고객, 국가/사회, 나아가 인류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혁신 방법론이다. 융합은 ‘연결을 통한 창발(創發)’이라는 점에서는 인류 역사만큼 오래된 기법이지만, 2000년대 초반 이후 정부나 기업, 학계/연구계가 주목해 온 것은 융합기술, 융합제품, 융합서비스, 융합산업 등을 만들어 내려는 의도적 혁신이다. 융합은 앞에서 소개한 모든 종류의 혁신 즉, 기술혁신과 비기술혁신, 그리고 사용자혁신, 비즈니스 모델 혁신 등 신개념 혁신에 모두 적용될 수 있다. 융합을 체계적으로 계획-실행-평가하기 위한 보편적 방법론은 아직까지 만들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학계/연구계에서는 학문/지식융합, 기술융합 등이, 산업 현장에서는 디지털 컨버전스, ICT/SW융합, 산업융합 등이 진행되고 있기에 효과적 방법론의 필요성이 커지고 있다. 향후, 시스템공학(System Engineering)을 위한 SEBOK나 프로젝트관리(Project Management)를 위한 PMBOK 같은 Body of Knowledge의 등장을 기대해 본다. 여전히 미완성이지만, 필자가 2010년에 제안한 융합경영은 경영 내지 기술경영 측면에서 융합에 접근하기 위한 방법론인 셈이다.
‘4차 산업혁명(4IR)’은 파괴적 혁신이 가능할 정도로 급속히 발전한 디지털 신기술(예: AI와 ICBM, 3D 프린팅, 무인이동체, 블록체인)과 바이오기술(BT), 나노기술(NT), 인지과학(CS) 등이 결합된 융합기술이 만들어 내는 대변혁이다. 4IR의 부분집합이라 할 수 있는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DX)은 4IR 기술 중에서 디지털 기반기술을 활용한 혁신이다. 4IR 대응이든 DX든 공정혁신(예: 스마트 팩토리), 제품혁신(예: 무인이동체) 외에 서비스혁신(예: 산업인터넷을 활용한 원격정비 서비스), 조직혁신(예: 디지털 리더십/역량 확보), 마케팅혁신(예: AI와 빅데이터를 활용한 고객이해와 고객경험 개선) 등 비기술혁신이 진행되고 있다. 기술혁신은 장기적, 지속적으로 수행해야 하는 과업임에 반해, 비기술혁신은 단기적, 전략적으로 수행할 수도 있는 과업이다. 이런 점에서 '기술혁신만이 혁신'이라는 고정관념 또는 무지(無智)에서 벗어나야 한다. 1992년에 처음 제정된 오슬로 매뉴얼은 비기술혁신의 중요성을 인지하고 1997년(제2판)에 조직혁신을, 2005년(제3판)에 마케팅혁신을 포함하였다. 2000년대 이후, 세계 최고 수준의 기업가치를 만들어 낸 기업들은 대부분 ICT/SW 분야의 선도기업(예: 구글, 애플, 아마존)이거나 비기술혁신(예: 넷플릭스, 우버, 에어비앤비)에 성공한 기업들이다. 우리나라가 자주 벤치마킹해 온 핀란드는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SW/서비스업에 대한 R&D 투자 비율을 확대했고 2007년 이후 HW/제조업에 대한 R&D 투자를 추월하고 있다. 국내에서는 언론사나 민간단체가 브랜드, 서비스, 품질경영 측면의 혁신기업을 선정하는 식의 활동을 하고 있지만, 정부 정책은 여전히 기술혁신에 치중되고 있고 대부분의 기업들도 비기술혁신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과 투자가 부족한 상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