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글은 필자가 2019. 6. 에 출간한 책의 본문 중 일부 (즉, '4차 산업혁명의 올바른 이해', 교보문고 퍼플, p.342~346)를 그대로 옮긴 것이다. 이는 필자가 그동안 블로그나 언론 기고 등을 통해 산발적으로 주장했던 것들을 종합한 것이다. 4차 산업혁명을 잘 못 이해하면 안 되는 이유들도 열거했는데 잘못된 이해로 인해 잘못된 생각과 행동으로 이어지는 일이 여전히 많아서 이곳을 통해 다시 한번 강조하려는 것이다. 오히려, 필자의 주장에 잘못된 내용이 있다면 어떤 점이 잘못된 것인지 지적해 주실 것을 부탁드린다.
<오해 #1> 4IR은 제조업에 대한 혁명이다?
영국 경제학자인 클라크(Clark)가 1930년대에 분류한 바에 의하면, ‘산업(industry)’은 1차 산업인 농/축산/임/수산업, 2차 산업인 제조업과 광업, 3차 산업인 서비스업 등을 포괄하는 용어이다. ‘산업’은 좁은 의미로는 제조(업)라는 의미로도 쓰인다. 슈밥이 제기 한 ‘4차 산업혁명’이란 용어에 ‘산업’이 들어 있고, 독일의 제조혁신 프로젝트의 이름이 Industrie 4.0이다 보니 4IR을 제조혁명으로 간주하는 오해가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슈밥의 의도를 헤아린다면 4IR은 ‘4차 산업혁명’으로 직역하기보다는 앨빈 토플러가 제기 한 ‘제3의 물결’(즉, 정보혁명)을 잇는 ‘제4의 물결(The 4th Wave)’로 의역하는 게 맞을 것이다.
4IR을 제조혁명으로 간주함에 따라 여러 가지 잘못된 접근이 나타난다. 예를 들면, 4IR에 대응하기 위한 정책/전략 수립 시 미국이나 EU, 독일, 중국 등의 제조혁신 정책 위주로 비교, 분석한 것이다. 슈밥도 언급했듯이 4IR은 급속하게 발전된 디지털 기술에 의한 전 산업의 변혁이기에 제조업은 물론, 1차 산업인 농/축산/수산/임업과 3차 산업인 서비스업 등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 대응해야 한다. 4IR에 대응하기 위해 어느 산업에 좀 더 집중할 것인가 하는 결정은 국가별 여건이나 역량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다. 예를 들면, 미국은 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서비스업이 압도적으로 높지만, 국가 차원의 기술경쟁력을 유지하기 위해 첨단제조에 대한 R&D에 집중 투자하고 있다. 또한, 미국은 정부/공공부문은 첨단기술에 대한 기술개발에 투자하고 민간부문은 혁신적 비즈니스 모델을 통해 서비스산업을 발전시키는 식의 역할분담이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인 것으로 볼 수도 있다. 독일이 Industrie 4.0을 추진하게 된 배경에는 압도적 우위인 미국 외에도 중국, 일본, 우리나라, 대만 등 아시아 국가들이 전통적인 제조 강국인 독일의 위상을 위협하고 있다는 위기의식도 작용했을 것이다. 일본의 Society 5.0은 제조업은 물론, 서비스업에 대한 육성 정책을 담고 있으며, 중국의 4IR 대응 정책도 ‘중국 제조 2050’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인터넷 플러스’ 정책 같은 전 산업에 대한 ICT 융합의 고도화 정책도 있다.
결론적으로, 4IR은 제조(업)혁명이 아니다. 전체 산업 중에서 어떤 산업을 First Mover로, 또 어떤 산업을 Fast Follower로 육성할 것인지는 전략적 판단이 필요한 문제이다.
<오해 #2> 4IR은 AI & ICBM이 만드는 혁명이다?
슈밥이 정의한 4IR은 우리나라 정부가 그리고 있는 ‘지능정보사회’나 ‘초연결사회’ 등과 공통점은 있지만, 같은 개념은 아니다. 슈밥의 설명을 음미해 보면, 디지털 혁명의 중추였던 ICT 내지 디지털 기술은 4IR 시대에는 ① 기술, 경제, 사회 전반의 인프라를 혁신하는 기반기술이면서 (: 3IR 시대의 역할 유지) ② 물질계 기술, 생명계 기술 등과 융합되어 인류 차원의 과제를 해결하는 범용기술(: 4IR 시대의 새로운 역할)이 되어야 한다. 우리나라 정부가 ‘AI & ICBM’으로 규정한 것은 사실상 모두 디지털 플랫폼 기술로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DX)의 핵심기술이다. ‘AI & ICBM’이 기반이 된 ‘초지능 & 초연결 사회’는 슈밥이 정의한 4IR 시대가 아니라 3IR이 성숙된 시대일 뿐이다. 3IR 시대의 정보기술(ICT)은 기업/국가의 비용절감을 지원하는 기술(: enabler)이었지만, 4IR 시대의 디지털 기술은 이윤 창출을 주도하는 기술(: transformer)이 되어야 한다.
4IR의 핵심기술을 AI와 ICBM 등 최근에 부각된 디지털 플랫폼 기술이 만드는 미래 사회로 한정하는 것은 첫째, 바이오기술(BT), 나노기술(NT) 등을 포함한 광범위한 지식 /기술의 융합을 소홀히 하거나 타 기술과의 시너지 창출 노력을 제한할 가능성이 있으며 둘째, 디지털 플랫폼 위에서 본격적으로 진행되어야 할 전통산업의 혁신이나 신산업 창출에 대한 투자가 상대적으로 작아질 소지가 있고, 셋째, 디지털 플랫폼이 산업별로 구축됨으로 인해 플랫폼에 대한 중복 투자와 상호운용성(interoperability) 부족 같은 문제가 생길 수 있다. 예를 들면, Industrie 4.0에서 규정한 가상물리시스템(CPS)은 제조업뿐만 아니라 모든 산업을 디지털화 하는데 쓰일 수 있는 기술이므로 산업 공통의 플랫폼으로 개발, 구축되어야 하는데 이를 제조, 의료, 유통 등 산업별로 구축한다면 위에서 얘기한 것과 같은 폐해가 생길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4IR 관련 외국의 정책을 비교함에 있어서도 예를 들면, 외국의 AI 정책만 비교, 분석하는 식의 편향(bias)이 생길 수 있다.
<오해 #3> 4IR 다음은 5IR이다?
클라우스 슈밥은 이미 4차 산업혁명이 시작되었다고 하고 제러미 리프킨은 지금은 3차 산업혁명이 진행 중이라고 한다. 2017년 기준, 전 세계 인구의 절반 정도가 인터넷과 스마트폰을 사용하고 있는 상태인 점을 감안하면, 정보혁명이 완성되었다고 보는 것도 무리가 있다. 다만, 선진국과 선도기업을 중심으로 슈밥이 규정한 4IR의 전조 내지 변혁이 시작된 것조차 부정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국내에서 혹자는 ‘5차 산업혁명(5IR)’을 거론하는 전문가도 있다. 4IR을 AI & ICBM 같은 디지털 기술이 촉발한 변혁으로 좁게 규정하다보니 슈밥이 제기한 4IR의 여타 기술들 즉, NT, BT 등에 의한 변혁과 이미 20년 전에 시작된 것으로 봐야 하는 융합혁명을 담을 프레임이 필요한데 그것을 5IR이라고 부르자는 것이 아닌가 싶다.
학자/연구자들은 앨빈 토플러가 정의한 1차 물결(즉, 농업혁명)은 대략 1만년이 걸렸지만, 2차 물결(즉, 산업혁명)은 1750년쯤부터 대략 150~200년쯤 걸린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3차 물결(정보혁명)이 1970년쯤 시작된 것으로 본다면 이제 50년 정도 지난 셈인데 ‘이미 4차 물결이 시작되었고 20~30년 내에 5차 물결이 시작된다’고 하면 그와 같은 변혁에 대한 준비와 대응조차 불가능하다는 얘기가 된다. 그런 논리라면, 4IR은 오랜 시간 동안 지속되는 거대한 ‘물결(wave)’ 내지 혁명이 아닌 ‘일상적인 변화’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제러미 리프킨은 현재 진행 중인 3차 산업혁명도 2050년쯤 성숙 단계에 이를 것이라고 하였다. ‘4차 산업혁명’이든 ‘5차 산업혁명’이든 하나의 용어가 국가 정책/ 전략이 될 때는 이해관계자들이 공감하고 합의하는 의미가 담겨서 적어도 의사소통에 혼란이 없어야 하고 정책/전략을 추진함에 있어서 그 범위와 접근방법이 분명해야 한다.
<오해 #4> 4IR은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DX)과 동일한 개념이다?
위에서 4IR과 DX가 등장한 시대적 맥락을 살펴보았지만, DX는 디지털 경제의 성숙 단계를 가리키는 것일 뿐, 클라우스 슈밥이 제시한 4IR과 동일한 개념은 아니다. 첫째, 기술면에서 보면, 4IR과 DX는 최근 발전된 디지털 기술(즉, AI & ICBM, 3D 프린팅, VR/AR, 블록체인 등)을 활용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지만, Schwab et al.(2018)은 4IR을 디지털 기술뿐만 아니라 BT, NT, 나아가 에너지/환경기술, 우주기술 등이 만드는 변혁으로 규정하고 있기에 DX와는 다르다. 둘째, 변혁의 대상을 보면, DX는 기업의 생산방식, 운영방식, 비즈니스 모델 등에 디지털 기술을 적용하는 것임에 반해, 4IR은 기업을 넘어 산업경제 전반에 신기술이 적용되고 그 결과 개인, 공동체, 정부 등 사회 전반에 새로운 질서가 만들어지는 것을 가리킨다. 셋째, 시기를 놓고 보면, DX는 인터넷이 확산되기 시작한 1990년대 중반 또는 2010년 이후에 시작되어 현재 진행 중인 변혁이고, 4IR은 DX와 비슷한 시기에 시작된 것이라 치더라도 변혁의 범위가 훨씬 더 넓고 깊기 때문에 DX보다는 더 오래 계속될 변혁이라는 점에서도 차이가 있다. 4IR은 2011년 IT 수요자인 독일의 전통산업(예: 지멘스, 보쉬)이 제기한 Industrie 4.0을 2016년에 슈밥과 WEF가 확장한 것이며, DX는 2011년 미국의 IT 공급자인 컨설팅업체와 대학(예: IBM, MIT, IDC 등)이 주축이 되어 발전시킨 것이다.
4IR을 DX와 동일 시 할 때 나타날 수 있는 문제점 중 하나는 미래사회를 준비하고 대응하기 위한 기술혁신, 산업혁신, 사회혁신 노력이 디지털 기술과 공급자 관점으로 진행될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다. DX도 마찬가지지만, 4IR에 대한 대응은 궁극적으로 인류가 당면하고 있고 머지않아 마주하게 될 사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시장 내지 수요자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술별, 산업별로 각개격파 하는 식의 접근이 아니라 문제해결에 필요한 이질적이고 다양한 지식, 기술들이 다학제/초학제로 접근해야 한다.
<오해 #5> 4IR은 가상계와 물질계의 융합이다?
4IR을 온라인과 오프라인 즉, 가상계와 물질계의 융합(예: O2O, Online to Offline)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이것은 독일 Industrie 4.0에서 미래의 제조시스템은 가상물리시스템(CPS)이 기반이 될 것이라는 주장을 확장한 것으로 짐작된다. CPS는 제조업이든 서비스업이든 모든 산업을 혁신할 수 있는 첨단 플랫폼 (기술)이지만, 그 자체가 4IR의 엔진이 될 수는 없다. 슈밥이 규정한 4IR은 가상계, 물질계뿐만 아니라 생명계를 포함하는 융합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CPS조차도 향후, 인간과 자연을 포함한 생명계를 배려하는 개념으로 확장되어야 한다.
4IR을 가상계와 물질계의 융합으로 규정할 때 생길 수 있는 문제점으로는 첫째, 생명계를 다루는 BT 및 의료기술과 가상계를 다루는 ICT, 그리고 물질계를 다루는 NT 등 기술간 융합을 통한 시너지 창출이 부족할 수 있고 둘째, 그 보다 더 큰 문제점으로 인간을 포함한 생명체에 대한 고려가 소홀해질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생명계에 대한 고려를 배제하고 AI나 로봇 기술을 도입한다면, 기계가 인간보다 능력이 우월한 문제에 대해서는 기계로 인간을 대치하는 식의 접근이 당연시 될 수도 있다. 4IR 은 슈밥이 제안했듯이 “4IR을 통해 인간 본성의 가장 중요한 부분인 창조성, 공감, 봉사정신 등을 보완하는 산출물이 만들어져서 인류가 공동운명체라는 인식 위에서 집합적, 도덕적 의식을 갖춘 존재로 발전되는” 기회가 되어야 한다.
<오해 #6> 4IR은 기술결정론이다?
슈밥의 4IR도 앨빈 토플러의 ‘제3의 물결’이나 제러미 리프킨의 ‘제3차 산업혁명’처럼 인류 문명이 기술발전에서 비롯되어 산업경제를 바꾸고 나아가 사회 변화를 촉발한다고 보는 기술결정론으로 간주될 수도 있다. 그러나, 슈밥은 4IR 시대에는 사회가 기술을 선택한다는 식의 사회구성론과 기술결정론 양쪽 모두가 위험하므로 기술에 대한 제3의 시각 즉, “모든 기술은 정치적(All technologies are political)”이라는 인식이 필요하다고 하였다(Schwab et al, 2018). 이는 기술이 사회를 바꿀 수도 있지만, 사회가 기술 발전을 조정/제어할 수 있으며 4IR 시대에는 반드시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 이유를 슈밥은 4IR 시대에는 기술의 발전/확산속도가 매우 빨라서 사회가 개입할 시간적 여유가 없고, 새로운 수단/도구들이 사용자에게 많은 권한을 부여하며(예: 3D 프린터로 총기를 제작할 수 있음), 인간을 감싸고(예: 드론) 인체에 내재되기(예: 바이오나노칩)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렇기에 모든 기술은 연구개발 단계, 단계마다 궁극적으로 구현될 시스템(예: 자율주행자동차)에 포함될 가정, 가치, 원칙과 그것이 사회에 미칠 영향력 등에 대해 사회적 논의를 거쳐야 한다는 것이다.
슈밥의 4IR은 급속하게 발전된 신기술로 인해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반에서 변혁이 일어날 것이라는 점을 주장한 것이지만, 기술과 사회는 별개가 아니라 긴밀한 상호작용이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4IR에 대한 논의와 대응을 기술(자) 중심으로 접근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