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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ukbo Dec 20. 2020

낭만에 대하여

나는 낭만을 잃지 않는 사람이 되어야지. 돈 모아서 옥탑방을 구하고, 망원경을 사서 옥상을 나만의 천문대로 꾸며야지.


20살 먹은 남**가 생각하던 낭만이었다. 그래, 뭔가 분위기 있는 나만의 공간에서 망원경으로 별 정도는 봐줘야 낭만적이라고 할 수 있지. 남다른 발상이라고 생각했는지 누가 물어보지 않아도 이거를 말하고 다니기도 했었다.

역시 발상일 뿐이었다. 망원경 사게 돈 모을 거라고 다짐했지만 전날 먹은 술값이 모자라서 학자금이 들어오는 날을 기다리는 신세였고, 옥탑방은 겨울에 춥고 여름에 덥다는 말에 거부 반응을 일으키는 나는 생각보다 시원한 여름과 따뜻한 겨울을 좋아하는 사람이었으니까.

애초에 사치였을지 몰라. 눈에 보이는 별보다 과제는 많지만, 시간과 돈은 없는 대학생이니까. 집 나간 낭만에 대한 합리화의 이유도 별보다 많았다. 2018년에 불면증에 시달리며 아픈 머리를 이불로 싸매고 억지로 자려고 누워 있으면서 이런 고민을 했지. “대체 낭만이 뭔데?”

매일 20000보씩 걸었던 유럽에서도 비슷한 생각을 했었지. 원래 걷는 것을 싫어하지도 않았고, 교통을 알아보기 귀찮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돈을 아껴야 했거든. 항상 돈과 시간 모두 없었지만, 그때는 돈만 없고 시간은 많은 교환학생이었으니까. 아 그리고 나는 교환학생은 부자들만 가는 건 줄 알았는데, 꼭 그렇지도 않더라 내가 갔다 온 거 보면.

어쨌든 걷는 것은 꽤나 낭비적인 행동이었다. 시간 낭비, 체력 낭비, 나는 길치였으니까 동선 낭비까지. 그래도 낭비만 있는 것은 아니었는데, 가끔 주위에는 무언가가 존재했다. 나는 일부러 느리게 걷다가, 멈춰서 괜히 응시해보기도 하고, 눈과 귀와 모든 감각으로 그를 느꼈다. 같은 길을 걷다가도 무심코 본 무언가에 발길을 멈추게 하는 그를.

꽤나 낭만적이었다. 걷는 것은 낭비적이면서 낭만적인 행동이구나. 낭비랑 낭만은 어쩌면 같은 낭 씨 먼 친척일지도 몰라. 내가 밤마다 산책을 나가는 이유지. 중요한 것은 옥탑방과 망원경이 아니었구나. 옥상으로 올라가 별을 보는 모든 낭비. 쓸데없는 짓이라고 해도 쓸데없는 거 제일 좋아한다고 하지 뭐.

나는 이제 진짜로 낭만을 잃지 않는 사람이 되어야지. 어제는 꿀호떡을 사 먹는 천 원짜리 낭만을 누렸고, 저번 주말에는 날이 좋아서 영화관까지 걸어가는 왕복 80분짜리 낭만을 누렸으니까.

아 참 그리고 나는 언젠가 진짜로 나만의 천문대를 가질 거야. 그날이 오면 천문대에도 희망찬 배경 음악이 흘렀으면 좋겠다, 동물원을 샀던 벤자민 미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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