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살던 부산에는 눈이 오지 않는다. 와봤자 쌓이지 않고 어딘가에 닿자마자 녹아버리는 정도. 초등학교 3학년 때였나, 부산에 눈이 엄청 많이 온 적이 있었다. 무슨 날이었는지 외가 쪽 식구들이 모두 모여서 항상 가던 식당에서 외식을 한 날이었다. 외할아버지가 살아계셨을 때니까 아직 어렸던 누나와 나, 사촌 동생들이 장기자랑을 했을 테고, 몇천 원 용돈을 받았을 거다. 어른들은 술을 마셨으니 꽤 늦게까지 식당에 있었을 거고, 가려고 문을 열어보니 눈이 엄청 오고 있었다. 나는 그때 바닥에 쌓인 눈을 처음 봤다. 티비에서만 봤었는데, 신나서 누나랑 흩뿌리면서 장난을 쳤던 것 같다. 어쨌든 눈이 많이 와서 집에 가지 못하고, 할머니 목욕탕 위 여관의 빈방에서 잠을 잤다. 아침에 아빠 코 고는 소리에 일찍 눈을 떴고, 밖에 나가보니 누나가 있었다. 사촌 동생도 있었나. 눈은 그쳤지만 많이 쌓여 있었고, 눈사람을 만들기 시작했다. 목욕탕 앞 주차장 아저씨가 치운 눈을 보태주셨다. 이제는 눈이 크게 낯설지 않다. 대전에 온 뒤로 겨울마다 봤고, 몽골에 봉사하러 갔을 때는 파묻혀 죽을 뻔했으니까. 어릴 때는 겨울마다 눈 좀 오게 해달라고 빌었었는데, 지금은 이렇게 아무렇지 않을 수 있는지. 왜 항상 바라던 건 많은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찾아오는지. 나는 엄마가 내 생활기록부에 적힌 숫자들 말고 내 생활을 궁금해하기를 바랐고, 내 성적보다 나를 더 걱정하기를 바랐다. 지금 엄마는 그런 것 같지만, 이제는 내가 아니다. 엄마, 전화도 잘 안 받고 대전 올 때마다 귀찮아해서 미안해. 부산도 자주 안 가서 미안해. 근데 나도 어색해서. 내가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해하는 엄마도 어색하고 내 걱정이 뭔지 궁금해하는 엄마도 좀 어색해. 조금 아프다고 말하자마자 1시간마다 한 번씩 괜찮냐고 전화하는 것도. 원래 안 그랬잖아. 엄마가 맨날 하던 돈타령 이제는 내가 하고 있으니까. 남들 다 하는 거 우리도 해보자던 것도. 그때 해보고 싶었던 건 이제 딱히 해보고 싶지 않고, 어차피 지금 해보고 싶은 건 지금은 못 하겠더라고. 이제는 머리가 커서 엄마나 할머니가 잔소리해도 하나도 안 무서운 것도 좀 이상해. 그렇게 무섭던 큰이모가 뭐라 해도 솔직히 뭐 어쩌라고 싶더라고. 시간이 너무 많이 흘렀나, 너무나 많은 물이 다리 밑으로 흘러갔나 봐. 항상 강을 보면서 멈춰 있는 거 아닌가 싶었는데 어쨌든 흘러가더라고. 오늘 밖에 나가보니까 눈이 많이 오더라. 1시간도 넘게 눈 맞으면서 걸어 다녔어. 손이 얼 것 같고, 신발에 눈이 들어오고, 몇 번이나 미끄러져 넘어질 뻔했는데도 이상하게 올해는 눈을 보는 게 신이 나더라. 발자국 위로도 눈이 계속 쌓이더라. 이미 쌓여 있던 곳 위로도 계속 쌓이고. 이렇게 눈이 계속 오면 시간이 어떻게 지나가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