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dukbo Apr 26. 2023

죽고싶다는농담

191012

지금 내가 읽고 있는 책의 제목은 ‘죽음의 에티켓’이다. 하지도 않는 과제와 퀴즈 핑계를 대며 팍팍 읽지는 못하고 있지만 그래도 절반 정도는 읽었다. 작년부터 ‘죽고 싶다’라는 말을 굉장히 많이 했다. 올해는 10번 말하면 0.01번 정도만 진심이라면, 작년에는 9번은 진심이었다.


아니 그런데 죽음에도 에티켓이 있다고? 읽어본 책의 내용은 딱히 그렇지 않지만, 어쨌든 제목을 보고 든 생각은 이랬다.


나는 왜 죽고 싶다고 했을까. 죽는다고 행복해질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도 지금보다는 덜 불행하겠거니 생각했다. 나는 사실 죽어보지 못했다. 죽어도 내가 덜 불행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질 수 없다.


친구의 장례식장에 가본 적이 있다. 다른 친구가 우는 것을 보고 이런 생각을 했다. ‘쟤는 내가 죽어도 울까?’ 그 친구는 아니어도 내가 죽으면 그래도 한 명은 울어주겠지. 나는 나의 죽음이 그 사람에게 슬퍼서 눈물을 흘릴 만큼의 존재인가? 글쎄, 내가 저 사람한테 그 정도로 특별하지는 않을텐데.


사실 나에게는 그 친구가 특별하다. 소중하다고 말하는 것이 좀 더 맞는 표현이겠다. 나는 나를 사랑하지는 못하지만, 나의 소중한 사람들은 사랑한다. 나는 그런 사람들에게 민폐를 끼치기 싫다. 그런 사람들이 나 때문에 우는 것을 보고 싶지 않다. 만약 진짜로 사후세계가 있다면, 그런 모습들을 보게 되는 것이 싫었다. 아, 민폐 끼치기 싫어서 죽음도 포기한 삶이라니. 적어도 내가 눈물을 받을 정도의 인물은 되고 죽어야지, 이런 생각을 하고 살았다.


내 죽음의 핑계를 만들어보는 것은 어떨까? 내 삶의 목적을 딱 하나로 정해볼까? 그럼 그것만 달성한다면 죽어도 상관없는 것 아닌가? 어쩌면 이게 버킷리스트를 만드는 이유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생각보다 죽기 전에 해보고 싶은 것이 많았다. 지금까지 살면서 죽기 전에 해보고 싶은 것을 아직 하나도 못 했다는 사실도 발견했지만, 어쨌든 이 방법도 실패했다.


공부하고 돈 벌어서 안락사가 합법인 나라로 이민 갈 거라고 말하던 때, 죽음의 정당성을 확보하려고 고민하면서 모순적으로 살아가는 방법에 대해 고민했다. 나 때문에 울 사람들을 위해 죽기 전까지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에 대한 고민.


몇 번이고 자살시도를 할 정도로 극심한 우울증을 앓다가 치료를 받으며 호전되고 있던 사람이, 갑자기 차 사고로 사망했다는 말을 듣고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내 인생의 타임라인에서 아직은 죽음보다 출생에 훨씬 가까운 위치라고 생각했었다. 자의 없이, 누군가의 눈물을 받을 정도의 인물이 되기도 전에 죽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 나는 너무나도 오만했다.


죽음에 에티켓이 있다면, 죽음을 겪는 사람이 아닌 곁의 사람들이 지켜야 하는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아니다. 죽음을 겪는 사람도 곁의 사람들에게 지킬 에티켓이 있다. 그 에티켓은 죽음 직전의 순간뿐만 아니라 살아온 삶을 통해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아무도 울지 않을 수도 있다. 그 모습을 보게 된다면 죽기를 잘했다는 생각을 하게 되겠지? 요즘은 어쩌면 해볼 만한 도박이라는 생각도 든다.

작가의 이전글 아득바득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