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가 들어도 추접하지 않으려면
내가 운영하는 다음의 인터넷 카페의 좌측 아래쪽을 보면 ‘자주 가는 링크’라는 메뉴가 있다. 만들어놓은 지 오래되었으나 한 번도 찾은 적이 없어 그런 곳이 있는지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오늘 운영자 한 분으로부터 동아일보의 인터넷 블로그가 폐지되었다면서 자신의 블로그 링크를 삭제해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첫 느낌은 기억이 안 날 텐데 어떻게 찾아 바꾸지?라는 당혹감이었다. 머릿속에 남아있는 것은 어떻게 했었다는 ‘방법’이 아니라, 몇 년 전 그것을 추가할 때 한참 헤맸었다는 기억뿐이었다. 아침을 먹고 컴퓨터 앞에 앉아 카페 관리 페이지에 들어가 이리저리 돌아다녔으나 몇 년 전 그랬던 것처럼 헤매기만 할 뿐 도대체 어디로 들어가 어떻게 수정해야 하는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아무 소득도 없이 두 시간이 금방 지나 포기한 상태로 스피커 볼륨을 키워 ‘7080 음악’을 들으며 과거를 회상했다. 이럴 때는 다른 생각이 효과적이라는 것은 경험이 알려준 지혜다.
한 때는 컴퓨터 시스템 – 과거의 컴퓨터는 50평이 넘는 전산실에 장치들이 가득했다 – 에 문제가 생기면 신이 났었다. 수 십 장의 커다란 종이에 거미줄 같이 그려진 회로를 추적해서 장애를 해결하고 나면 희열을 느꼈다. 꼼짝하지 않던 ‘마그네틱 테이프(전산실 주변장치의 일종)’가 위~윙하는 기계음과 함께 돌아가면 뿌듯했다. 시스템에 문제가 생기면 자다가도 뛰어나올 만큼 재미있었다.
1980년대 후반 개인용 컴퓨터가 일반화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모르던 명령어를 외워서 실행시키는 맛에 책을 사서 개인적으로 공부했다. 지금도 기억하는 책이 있다. ‘Inside IBM PC’라는 책을 구입해서 밑줄을 쳐가며 몇 번을 읽었고, PC에 관한 월간잡지는 모두 사 모았다. 윈도우가 처음 나왔을 때는 그것을 익히느라 밤을 새도 피곤한 줄 몰랐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그랬다. 교육받으러 다니다 부장에게 찍히기까지 하면서도.
언제부턴가 달라졌다. 언제부터였을까? 확실하지는 않지만 가까운 글씨가 안 보이고 기억력에 자신이 없어지면서부터였던 것 같다. 문제가 생기면 겁부터 났으며 직접 해결하려들기 보다는 다른 사람을 의지하고 싶어 졌고 아랫사람에게 전가시켰다. 자신의 분수를 잊고 전처럼 직접 대들다가 일이 더 크게 잘못되는 일까지 발생했다. 그래도 일을 시키는 것은 나였다. 디테일은 몰라도 전체적 윤곽은 놓치지 않아야 했다.
‘윈도우95’는 98과 밀레니엄을 거쳐 ‘윈도우XP’로 진화했고, 나는 XP를 마지막으로 현역에서 떠났다. 지금은 ‘윈도우7’과 ‘윈도우8’을 거쳐 ‘윈도우10’이 사용된 지 오래지만, 내 수준은 XP에 머물러있다. 솔직히 말하면 XP도 가물가물하다. 전형적인 초기 치매증상인지 모르겠지만 더 젊었을 때 익혔던 95가 더 친숙하다. 언제부턴가 뇌세포에 저장되는 것보다 빠져나가는 것이 더 많아졌다. 기를 쓰고 외운 것도 시간의 차이가 있을 뿐 빠져나가는 것은 같았다.
카페의 글에 링크를 걸기 위해서 공부한 HTML도 외우는 것을 포기하고 자주 쓰는 것들만 메모해두고 카피해서 사용한다. 밑 빠진 독이 바로 내 기억력이다. 지극히 당연한 말이지만 이렇게 되자 변화보다는 오래된 옛 것이 좋다. 아니, 편하다. 새로운 버전의 윈도우가 나오면 오히려 불안하고 손해 보는 느낌이 든다. 어차피 새 기능을 배워서 쓴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용어도 생소하다. 요즘 뜨거운 이슈인 가상화폐는 ‘블록체인’이라는 기술에 바탕을 둔다는데 생전 처음 들었으나 알고 싶지도 않다. 옛날 같으면 기를 쓰고 이해했을 것이지만.
아이들은 쉽게 변한다. 부모에게 본 대로, 학교에서 가르쳐주는 대로, 친구에게 들은 대로 새로운 지식으로 무장하고 사고와 행동을 바꾼다. 어른이 되면 좀처럼 바뀌지 않는다. 부모나 직장상사의 지시가 옳고 정당해서 따르는 것이 아니라, 그래야 하기 때문이고 하는 수 없어서 복종할 뿐이다. 힘들게 변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오랜 설득과 논쟁을 거치거나, 지난한 일을 경험하는 충격이 가해져야 가능해진다.
노인을 바꾼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새로운 사고와 개념이 자리하기에는 뇌세포가 부족하고 딱딱해졌다. 그나마 열심히 배워야만 새로운 개념을 머릿속에 넣을 텐데 그러지도 못한다.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시간이 턱없이 부족한 것도 공부를 멀리하는 원인이다. 써먹을 시간이 별로 없으니 공부하는 시간이 아깝다. 그러니 낡은 사고와 개념을 지닌 채, 지금까지 살아온 방식대로 살다가 갈 뿐이다. 교과서에 나오는 보수적 사고다.
음악을 들으며 과거를 회상하던 중 갑자기 구글이 떠올랐다. ‘자주 가는 링크 변경’이라는 키워드로 구글링을 해서 방법을 바로 찾았다. 이렇다니까! 딴생각을 해야 한다니까! 늘 하는 구글이 왜 두 시간 전에는 생각나지 않았을까? 습관 때문일 것이다. 구글을 알고 산 시간보다 구글 없이 살아온 시간이 훨씬 길다. 문제를 닥치면 친숙했던 과거로 돌아가고 만다. 낡음 때문에 아침시간을 두 시간이나 낭비했다. ‘Daum’에 있는 카페이니 ‘Daum’ 안에서 해결하려던 것이 잘못의 출발이었다.
노인들끼리만 어울려 살면 문제가 안 된다. 나이가 들어도 젊은 사람들과 부대끼며 산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 젊었던 내가 만났던 권위적이기 만한 직장상사, 부질없는 고집의 부모님이 안 되려면 낡음을 버리고 새로운 개념으로 무장해야 하지만 쉬운 일이 아니다.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기에는 뇌세포 숫자가 너무 부족하고 굳기까지 했다. 방법은 없을까? 두 가지가 떠오른다.
행복해서 웃는 게 아니라 억지로라도 웃으면 행복해진다고 했던가. 억지로 젊은이들의 새로운 사고가 맞고 내 낡은 사고가 틀렸다고 인정해보면 어떨까. 그러면 낡음을 벗어버릴 수 있지 않을까. 신지식으로 무장한 젊은이가 지금 세상에서는 맞으니까 낡은 내가 그들에게 지면 된다. 잔소리를 삼가고 그들의 말에 경청하는 것이다. 그것이 힘들다면 스스로가 낡았다는 것을 인정하면 된다. 30년 전 만났던 직장상사나 부모님과 다름없이 나도 어리석은 독선으로 가득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덜 어렵다. 내가 그분들보다 더 똑똑지 않으니 당연하다. 그러면 아이들이 대화를 꺼려해도 기분이 나쁘지 않다.
6~70년을 살아온 인생철학과 경험을, 앞으로 남은 20년을 위해 바꾸고 싶은 사람은 없다. 생긴 대로, 살아온 대로 앞으로도 살아갈 뿐이다. 단지 강퍅스럽게 늙지 않으려면 인정하면 된다. 나 자신이 낡았다는 것을. 그것이 바로 법륜이 설파한 '바로보기(正見)'다. 그래야 젊은이들과 더불어 살아갈 자격이 생기지 않을까. ~ 추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