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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추조 Nov 23. 2017

'칼의 노래'를 읽고

독후감

(책을 읽고 독후감으로 시작한 글이었으나, 정치적 내용이 포함된 글이 되었습니다. 불편한 분들은 '백스페이스'키를 눌러서 지나가시기 바랍니다.)


 여수는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로서 이순신 장군이 근무했던 전라좌수영이 있는 곳이다. 이곳에서 장군은 임진왜란을 만났으며, 이곳을 근거지로 한산도와 부산 앞바다까지 출정하여 왜의 군선과 함대를 무찔렀다. 


 지금도 당시의 좌수영 청사가 진남관이라는 이름으로 존재하고, 그 근처 이순신 광장에는 실물 크기의 거북선이 전시되어 있다. 또 여수 소호동 근처에는 장군께서 전함을 건조하던 선소(船所)가 있어서 내년부터 본격적으로 유적지로 개발한다고 전해진다. 이렇듯 여수라는 도시는 장군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는 곳이다. 


우리 민족 반 만 년 역사 속에 가장 위대한 분을 한 분만 뽑는다면 충무공이 언제나 그 자리를 차지한다. 그러나 일반인들이 그렇듯이 나도 그분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었다. 기껏해야 어렸을 때 위인전에서 읽었던 내용이 대부분의 줄거리를 차지한다. 


 어렸을 때부터 남다르게 무예와 용기가 출중해서 소년 시절에 무과에 급제했으며,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바다에서 왜군을 만날 때마다 연전연승하다가, 원균의 모함을 받아 모든 관직을 잃은 채 옥에 갇혔고 백의종군했으며, 12척의 배로 명량에서 300여 척의 왜선을 격파하고, 돌아가는 왜군을 노량에서 쳐부수다가 장렬하게 전사했다는 것이 그것이다. 


 ‘불멸의 이순신’이라는 TV 드라마와 ‘명량’이라는 영화를 보았으나, 장군에 대한 이미지가 너무 커서 그랬겠지만, ‘김명민’과 ‘최민식’이 맡은 연기자가 충무공의 이미지와 너무 달라서 와 닿는 게 별로였으며 감흥도 그저 그랬다. 장군은 어떤 인간적 면모를 가졌기에 그런 위대한 업적을 가졌을까. 


 처음에는 난중일기를 읽으려고 했는데 도서관에서 빌릴 수가 없는 책이었다. 그래서 택한 것이 꿩 대신 닭이라고 김훈 선생의 ‘칼의 노래’였다. “김훈 선생의 작품은 특이한 게 있어요. 그리고나 그래서와 같은 접속사를 일절 사용하지 않습니다.”라는 뉴저지 글벗의 평도 한몫 거들었다. ‘접속사를 사용하지 않고 어떻게 문장을 연결하지?’ 


 글벗의 말대로 책에서 접속사를 거의 볼 수 없었다. 320여 페이지를 읽는 동안에 딱 두 개의 접속사를 보았다. ‘그렇다더라도’와 ‘그러나’였다. (자칭 글쟁이라는 입장에서 평하자면) 잘 쓴 소설이라기보다는 작품을 위한 사전 연구를 정말 많이 했다는 느낌이었다. 작가의 실수인지 인쇄소의 잘못인지는 몰라도 오류도 보였다. 장군이 작은 배를 타고 사복 차림으로 영산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장면에서 처음에 있던 수행자 이름이 중간에 바뀌어 나왔다. 


 작가의 고충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여진’이라는 관기를 장군이 품는 장면을 삽입한 구성이 엉성했다. 삽입하려면 인과(因果)에 보다 철저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작가의 뛰어난 상상력 때문인지는 몰라도 책을 덮은 후에 감동과 여운은 길게 남았다. 여운은 의문이었다. 어떻게 그때나 지금이나 역사가 비슷하게 되풀이될까? 


 ‘칼의 노래’는 장군을 일인칭 화자로, 임진왜란이 발발한 지 6년째인 정유년에 시작해서 전쟁이 끝나는 다음 해 무술년까지의 이야기로, 김훈 선생이 난중일기와 징비록, 조선왕조실록에 근거하여 재구성한 소설이다. 


 금년이 바로 정유년, 닭띠 해다. 한 갑자가 60년이니까 정확히 7번의 갑자가 돈 420년 전의 일이다. 그해 2월 조정의 당파싸움으로 인한 간신에 의해 농락당한 선조는 장군을 한양으로 압송되어 심한 고문을 한다. 장군의 후임으로 임명된 삼도수군통제사 원균이 왜군에 대패하여 수군을 전멸시키고 전사하지 않았다면, 백의종군 기회도 없이 어리석은 임금에 의해 살해되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1592년 임진년 4월 14일 새벽 5시 부산에 상륙한 왜적의 공격으로 당일 부산이 함락되면서 무너지기 시작한 조선은, 보름만인 4월 28일 신립 장군이 남한강에서 대패하면서 4월 30일 선조는 한양을 버리고 의주로 도망간다. 그야말로 파죽지세였다. 부산까지의 거리와 420년이라는 시간을 고려하면, 전쟁 사흘만인 1950년 6월 27일 서울을 버리고 대전으로 피신한 이승만 대통령이 어찌 그리 닮았을까. 여섯 갑자와 두 해가 더 지났을 뿐, 선조가 했던 그대로 되풀이다. 


 어리석은 군주 선조의 모습은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도 그대로 투영된다. 진영 보사부 장관이나 유진룡 문체부 장관 같은 바른 말하는 충신을 쳐내고, 문형표나 김종덕 같은 꼭두각시에 불과한 간신을 장관으로 등용한 것과, 전쟁 중임에도 파당 싸움질이나 하는 간신들에게 농락되어 장군을 투옥시킨 선조와 다를 것이 없다. 차이가 있다면 선조는 주권이 왕에게 있던 왕조시대의 군주였다는 것뿐이다. 덕분에 선조는 다섯 살에 즉위하여 41년 동안이나 군주의 자리를 차지했고, 국민이 주권인 시대에 태어난 불운 탓에 박근혜 전 대통령은 자신의 임기도 채우지 못한 채 교도소 신세가 되었다.


 작가의 사전 연구에도 불구하고 인간 이순신에 대한 호기심을 채우는 데는 많이 부족했다는 느낌이었다. 아마도 역사적 고증이 부족했고, 충무공에게 혹시 누가 될까 봐 사실에 충실하려고 했기 때문이라는 짐작은 가능했다. 단지, 420년 전의 역사를 오늘날과 비교해서 읽는 재미는 남달랐다.


 400년 전이나 지금이나 시대를 불문하고 분명한 사실이 있다. 지도자가 어리석으면 고통은 민초들의 것이다. 임진왜란 7년 동안 우리 조상들은 너무 비참했다. 생존을 위해 송장의 옷과 신을 벗겼으며, 심지어는 아이들까지 잡아먹었다는 기록이 있다. 왜군들이 술에 취해 토하면, 아이들이 달려들어 오물에 섞인 밥알을 주어먹었다고 책은 전한다. 왕은 피난 중에도 후궁들의 시중을 받으며 지냈고, 눈물은 흘렸어도 밥을 굶지는 않았다. 대통령은 일반인들과는 달라서 구치소에서도 특별대우를 받는다.


 어리석었던 한국의 지도자는 지금 구치소에 있지만,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아직도 많이 남았다. 어리석은 지도자를 어떻게 했는지, 미국은 한국에서 배워갈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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