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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추조 Feb 07. 2018

은퇴(隱退)란?

 은퇴란 어떤 상태를 의미할까?라는 질문으로 글을 시작한다. 은퇴(隱退)의 ‘은(隱)’은 ‘숨기다’는 뜻이고 ‘퇴(退)’는 ‘물러나다’는 의미의 한자어다. 따라서 글자가 의미하는 바는 숨거나 물러나는 행위다. 국어사전에 나오는 사전적 의미는 ‘직임에서 물러나거나 사회활동에서 손을 떼고 한가히 지냄’이다. 여기서 ‘직임(職任)’이란 ‘맡은 바 임무’, 즉 벼슬을 의미한다. 사전에 은퇴와 유사한 단어로 ‘낙향’과 ‘한거(閑居)’가 있는 것을 보면, ‘벼슬에서 물러나 고향에서 한가로이 거주하는 상태’ 일 것이다.


 영어로 ‘Retire’는 보다 다양한 의미가 있다. 군대가 퇴각하는 것도 ‘Retire’이고, 잠자러 가는 것도 ‘Retire’이며, 경기에 져서 탈락하는 것도 ‘Retire’다. 어쨌든 공통적으로 갖는 의미는 ‘쉰다’이다. 급변하는 현대 사회의 복잡성으로 인해 기존 개념에 대한 해석이 바뀌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은퇴의 사전적 의미도 재해석할 필요를 느낀다. 다른 의견도 얼마든지 있겠으나 내가 생각하는 은퇴란, ‘자식이 성인이 된 이후 경제활동과 무관하게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는 상태’라고 재해석하고 싶다.


 ‘자식이 성인’이란 의미는 시간을 가리킨다. 자식이 없다면 시간의 의미도 없다. 법륜스님은 만 스무 살을 성인으로 보았다. 내가 살던 미국 뉴저지 주 가정법에서 정의하는 성인은 22세다. 어느 쪽이든 판단은 본인이 하는 것이나 자식이 성인이 될 때까지 부모로서 부양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기에 시간을 설정했다. 콜로라도 덴버에 사는 절친은 마흔 살이 넘은 늦은 결혼으로 아이가 이제야 18살이 된다. 경제적 여건에 상관없이 그 친구는 은퇴할 생각을 하지 못하고 승용차와 기차를 번갈아 타고 편도 두 시간이 걸리는 회사로 지금도 출퇴근하고 있다.


 ‘경제활동과 무관’의 의미는 경제여건에서 자유롭다는 것인데 추가 설명이 필요하다. 이것은 다음에 나오는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는 상태’와 연관된다. 사실 경제여건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게다가 은퇴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돈은 ‘다다익선’이라는 점에서 절충이 필요하다. 따라서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할 만큼의 경제여건이면 된다는 의미다. 반대로 해석하면 허락된 경제적 조건 가운데서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찾으면 된다.


 다시 말하자면, 지금 하고 있는 일에서 충분히 만족하고 즐겁다면, 그리고 돈 때문에 일하는 것이 아니라면 일(벼슬)에서 떠나지 않아도 은퇴생활이다. 80세가 다 되도록 미시간 주에서 의사로 일하는 분은, 환자를 만나 진단하고 도움을 주는 게 즐거워서 파트타임으로 일하며 생기는 수입 때문에 월 3천 불이 넘는 정부 연금도 받지 않는다. 이런 분은 일 자체가 은퇴생활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런 천운(?)을 타고난 분은 아주 드물어서, 대부분의 사람은 경제적 노예(?) 상태로 죽기보다 싫은 일터로 출근하면서 월요병에 시달리는 게 현실이다.


 ‘좋아하는 일’이란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범위 내에서 스스로의 마음을 즐겁게 하는 모든 행위를 말한다. 운동, 여행, 낚시, 원예, 음악, 미술, 봉사, 독서와 창작 등 평소에 하고 싶어도 경제활동에 매여 시간이 부족해서 실행하기 어려웠던 일들이다. 만약 좋아하고 즐거운 일이 없다거나, 하고픈 일이 있지만 비용 때문에 할 수 없다면 은퇴했어도 은퇴한 것이 아닌 게 된다. 즐길 수 있는 소일거리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의미다.


 무능력으로 조기 은퇴하는 바람에 미국에서의 생존을 포기하고 귀국했던 나는, 처음에는 일 년에 한 차례 이상 주변 나라를 여행하고 그린피가 저렴한 제주에서 골프도 즐길 계획이었다. 그러나 여행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집사람이라는 현실과 타협할 수밖에 없었고, 타고난 게으름이 여행 같이 번거로운 노력을 포기하게 만들었다. 골프는 친하지 않은 사람들과 라운딩 할 정도로 좋아하지는 않아서 가져온 골프연장만 지금도 백안에서 녹슬고 있다.


 대신으로 찾은 것은, 과거 수 십 년 동안 내가 일하던 방식으로 책상에 앉아 모니터를 보며 글을 쓰거나 책을 읽는 일이다. 한 달만 있으면 카페를 개설한 지 7년이 되니까, 그 세월만큼 스스로 즐거운 일을 찾아 은퇴생활을 해온 셈이다. 더군다나 비용이 별로 들지 않으니 넉넉지 않은 경제여건에도 더 이상 적합할 수도 없다. 겨울철이긴 하나 요즘도 바쁘게 지낸다. 시립도서관에서 빌려온 책도 읽어야 하고, 쓰고 있는 글도 계속 진도를 나가야 하며 보려고 다운로드한 영화나 다큐도 많이 밀려있다. 날씨만 따뜻해지면 안 가본 섬들을 찾아다니며 걸을 생각에 벌써부터 설렌다.


 은퇴 후 활동으로 여행을 언급하는 분들이 많다. 나도 한때는 그런 생각을 했으니까. 돈이 아주 많으면 영화에서처럼 풍선을 타고 ‘80일간 세계일주’도 가능하고, 우주선을 타고 대기권 밖에 머무르는 특별한 경험도 할 수 있겠지만 그런 사람은 별로 없다. 대부분 부부가 함께 하는 자유여행이나 패키지여행이다. 아니면 노인들에게 적합한 크루즈 정도다. 바하마 크루즈와 옐로우스톤 패키지여행을 해보았으나, 짜인 스케줄대로 움직여야 하는 여행이 적성에 맞지 않은 탓인지 감흥도 없어서 다시 하고픈 생각은 별로 없다.


 2002년 우울증에 걸린 집사람을 위해 여행을 해보라는 의사의 권고대로 콜로라도 주를 자유여행으로 돌아본 적도 있으나 결과는 신통치 않았고 재미도 없었다. 몇 년 후 샌프란시스코에서 LA까지 캘리포니아 서부 해안을 따라 주변을 혼자 했던 자동차 자유여행은 너무 청승맞았다. 가장 인상적이고 오래도록 생생하게 기억에 남았던 여행은 3년 전 이맘때, 카페 활동으로 만난 분과 함께 했던 동남아 자유여행이었다. 이틀 동안 배를 타고 메콩을 거슬러 오르고, 버스를 타고 국경을 넘고, 돼지, 염소와 함께 50년도 더 된 낡은 버스를 타고 다녔던 경험은 아마도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추억으로 남았다.


 이런 경험을 말하는 이유는 여행 그 자체보다 여행에 대한 적성과 동반자를 강조하고 싶어서다. 최근에 은퇴에 대한 글들을 보고 무언가 중요한 핵심이 빠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글의 대부분이 금전적인 문제에 치중되었다는 것이다. 여행은 쉬운 일도 누구에게나 재미가 있지도 않고, 아무나 할 수 있는 취미도 아니다. 세계적인 배낭여행가 한비야나 박일선 님처럼 혼자 다닐 수 있는 열정과 배짱이 없다면 너무나 힘들기도 하고, 은퇴생활로 여행을 즐기기 위해서는 본인의 적성과 동반자도 그만큼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특히 ‘하늘로부터 점지받은 찰떡궁합(?)’이야말로 필수조건이다.


 은퇴의 목적은 여행이 아니라 즐거움에 있다. 은퇴에 있어서 돈보다 중요한 필수조건은 부부금슬이며 즐길 수 있는 일이 있음이다. 지난 7년 동안 한국에서 은퇴생활을 한 경험자의 조언이다. 무능한 사람의 변명이니 말이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해서 무시해도 좋다.


- 2018년 2월 6일 추조 생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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