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이나 미국이나 자본주의 국가에서는 의사와 변호사가 최고의 직업이다. 여기서 최고라는 것은 수입이 좋다는 의미로 사람의 약점을 이용해서 돈을 버는 직업이다. ‘히포크라테스의 선서’를 지키는 의사가 몇 명이나 될까, ‘신 앞에 평등’하다는 플라톤의 정의이념에 충실한 법조인이 얼마나 될까.
가수 신해철의 죽음과 O. J. 심슨의 무죄판결에서 보듯이 히포크라테스 선서와 플라톤의 정의는 똥통(Shithole)일 뿐이고, 의사에게 선서란 돈에 대한 서약식이고 변호사에게 정의란 바로 돈이 아니라면, 환자를 돈으로 본 의사나 돈이 곧 정의라고 본 변호사가 아니라면 이해하기 힘들다.
세상에 가장 비겁한 짓이 상대의 약점을 이용해서 윽박지르는 일이다. 갑질이 비난받는 이유와 같다. 약점이 없으면 갑질을 당할 이유가 없다. 아프지 않으면 의사를 만날 필요도 없고 법을 위반하지 않았다면 변호사를 찾을 일도 없다. 많은 사람들이 조기 은퇴를 꿈꾼다. 왜일까. 돈을 번다는 것은 시간과 같은 자신의 자원을 사용하여 자신이 좋아하지 않는 일을 한다는 뜻이기 때문은 아닐까. 약점을 잡혀 살고 있다는 의미와 다를 바 없다.
“시니어로 일도 그렇게 편하고 연봉도 십만 불이 넘는데 왜 그렇게 일찍 은퇴했어요?” “하하하, 아무리 일이 편하다고 해도 출근해서 윗사람 지시에 따라야 하잖아요. 그게 싫었어요.” 무능력으로 억지 은퇴한 나와는 다르게, 70세 이상까지 근무할 수 있는 미국 연방 공무원이라는 안정된 직장을 58세에 스스로 떠난 어떤 분과 몇 년 전 나누었던 대화의 일부다. (돈으로부터) 그의 자유로운 영혼이 많이 부러웠다. 자본이 갑이고 그에 의해 지배되는 사람들은 을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든 사례다. (이하 갑과 을로 약칭 사용)
스포츠가 재미있는 것은 룰이 공정하게 적용되기 때문이다. 한국 축구의 승리를 아무리 바란다고 하더라도 심판의 편파적 판정으로 이겼다면 찜찜함을 지우기 어렵다. 하지만 승리에 집착한 선수들은 심판의 눈을 피해 반칙을 저지르기도 하고 심판은 매의 눈으로 반칙을 적발하고 호루라기를 불어댄다. 그리고 간혹 약팀이 강팀을 잡는 이변이 생겨서 관중을 열광시킨다.
최약체로 평가받은 베트남의 ‘2018 아시아 축구연맹(AFC) U-23 챔피언십’ 준우승은 그래서 즐겁다. 만약 강팀이 항상 이기기만 한다면, 그것도 심판의 편파적 판정 덕에 승리한다면 축구가 재미있을 리도 없고 관전할 가치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그런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난다. 특히 정치가 그렇다.
갑을 위한 - 미국의 공화당이나 한국의 자한당처럼 보수라고 불리는 – 정치집단의 가장 큰 문제는 자본을 가진 강팀에도 불구하고 국민(심판)의 눈을 가릴 수만 있다면 선거라는 공정한 게임에서 반칙을 서슴없이 저지른다는 점이다. 부정선거 자유당의 이승만과 유신독재 공화당의 박정희가 그랬고 군부독재 민정당의 전두환과 민간인 사찰과 국정원 댓글 한나라당의 이명박이 그랬다.
이러한 반칙은 미국이라고 다르지 않다. 존 F. 케네디와 로버트 케네디가 암살당했고 킹 목사가 그랬다. 모두들 민주당이었다. 아버지 부시의 반칙- 악의적인 네거티브 거짓 모략 –이 없었다면 미국의 41대 대통령은 ‘마이클 두카키스’가 되었을 것이고, 아들 부시가 플로리다 재검표를 받아들이는 공정한 게임을 했더라면 결과가 뒤집혔을 수도, 금융위기가 안 벌어졌을 수도, 계획했던 대로 나는 지금쯤 RV로 미국을 여행하고 있었을 수도 있었다. 미국 정치사에서 최악의 스캔들이었던 워터게이트 사건도 공화당의 닉슨에 의해 저질러졌다.
혹자는 상대편도 같은 반칙을 저지르지 않느냐고 반문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반칙의 의도가 다르다. 태클이 늦어서 공이 아닌 상대 선수의 발을 거는 ‘트리핑 파울’은 공과는 상관없이 공포심을 주거나 다치게 할 목적으로 발을 높이 들고 들어가는 태클은 차원이 다르다. 공산군에게 남편을 잃은 아낙의 공포심을 자극할 목적으로 DJ를 빨갱이로 모는 것은 더럽고 치사한 반칙이다. 북한 정권에 대응할 목적으로 편성된 국민의 세금을 정치적 반대세력을 편 가르고 탄압하는데 사용한 것은 ‘레드카드’로도 부족한 악질적인 파울이다.
갑으로서 권력까지 가진 트럼프가 무슨 일을 하는지 보면 명백해진다. 부유한 자신들을 위한 감세를 추진하고, ‘을’ 축에도 못 끼는 불법 이민자의 미성년 자녀들을 국제적 미아로 만드는 ‘비합법 입국 청년 추방 유예 프로그램(DACA·다카)’ 폐지다. 자신의 딸과 사위를 백악관 고문으로 채용하고 가난한 나라를 ‘똥통(Shithole)’에 비유하며 무시하는 일이다. ‘미국 우선주의’를 강조한 최악의 연설로 다보스포럼에서 망신을 당했으면서도 자화자찬으로 일관하고, 구겐하임 미술관이 소장한 반 고흐의 그림을 임대하고 싶다는 트럼프에게 그림 대신 ‘황금 변기설치’를 제안했어도 수치를 모르는 후안무치는 그저 놀라울 뿐이다.
당선을 위해 지역감정을 부추기는 것은 비겁한 반칙이요, 쉽게 당선될 곳을 두고도 뻔히 떨어질 줄 알면서 고향에 출마하는 것은 모두에게 찬사 받아 마땅한 ‘페어플레이’다. 어떤 게임에서건 공정함이 가장 우선시 되어야 할 가치라면, 반칙과 페어플레이를 가려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축구에서는 심판의 역할이고 정치에서는 국민이 감당해야 할 몫이다. 이놈이나 그놈이나 차이가 없어서 관심 없다는 논리는 어리석을 뿐이다. 페널티 지역에서의 핸들링 파울이, 센터라인 근처에서 범하는 홀딩과 같다는 논리는 어불성설이다. 그랬기에 트럼프 같은 후안무치 인물을 당선시켰다.
축구심판에게 매의 눈이 필요하다면 국민에게는 ‘깨어있음’이 요구된다. 아무 근거 없이 몰아붙이는 ‘종북좌빨’ 논리에 넘어가는 것은 깨어있는 것이 아니다. 과도한 복지 논리에 함몰되는 것은 속임수에 눈을 감는 것이다. 재정만 있다면 복지에 지나침이란 없다. 문제는 재정인데 재정은 국민의 세금에서 나온다. 따라서 세금을 내더라도 그에 대한 대가만 충분하면 된다. 많은 세금을 내고도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은 10% 이내의 부자들뿐이다. 10%의 부유층도 아니면서 과도한 복지 운운하는 것은 10% 부자들의 속임수에 걸리는 것이다.
가짜 뉴스가 난무하는 이 시대에 누가 존경받을 사람일까? 누가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에 당선될만한 정치인일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그런 인물은 한결같다. 바로 자신의 이익을 구하지 않는 인물이다. 석가모니가 그랬고 예수도 그런 분이었다. 충무공 이순신을 우러르고 세종대왕을 기리는 이유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고 성경은 가르치지만 지금의 시대는 누구나 하느님 나라에 가지 않더라도 부자가 되어 갑으로 살기를 원한다. 따라서 갑이 아닌 사람, 갑이기를 피하는 사람이 이 시대에 필요한 인물이다. 그래야 공정한 게임으로 간혹 을이 갑을 이기는 세상을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2002년 한국의 히딩크처럼, 2018년 베트남의 박항서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