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의 추태
지난 금요일 밤이었다. 세종시에 있었던 모임을 마친 후 신탄진에서 출발하는 기차를 놓치는 바람에 고속버스를 타고 예상보다 두 시간이 늦은 8시 반에 여수 버스 종합터미널에 도착해서 시내버스를 탔다. 빨리 집에 가서 후줄근한 몸을 더운물로 샤워하고 싶었으나 슬로 라이프를 지향하는 은퇴인의 삶에는 택시보다는 버스가 제격이다.
마침 5분 후 기다리던 버스가 왔고 서있는 중고등학생이 있었어도 빈자리가 있었다. 집에 거의 왔을 무렵이었다. 정류장에서 몇 명이 하차하고 난 후 어느 노인이 천천히 일어나 출입문 쪽으로 갔다. 출입문이 닫히고 노인은 하차하겠다는 벨을 눌렀으나 버스는 이미 출발한 뒤였다. 노인이 소리쳤다. “내린다고 벨 눌렀잖아!” 버스는 다음 정류장에 도착해서 문을 열었고 또 승객 몇이 내렸다.
노인은 내리는 대신 운전수에게 다가가 따지기 시작했다. “내리겠다고 벨을 눌렀는데 왜 출발하는 거야? 난 노약자야, 넘어져 다치면 당신이 책임질 거야?” 버스 기사가 답했다. “출발한 다음에 벨을 누르면 어쩌라고요? 빨리 내리세요.” 노인은 기사의 말대꾸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내리지도 않고 운전수석에 붙어 시비를 걸었다. 버스 안에는 어린 학생들과 젊은 여성들이 대부분이었다.
서너 정거장만 가면 도착하는 나는, 노인의 억지에 짜증이 났다. “아저씨, 뒤에서 계속 보았는데 아저씨가 잘못했구먼요, 운전 방해하지 말고 이제 그만하세요.” 내 말을 들었는지 말았는지는 몰라도 버스를 출발시키는 기사에게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로 투정을 부렸다. 정류장에 버스가 다시 정차하자 노인은 뒤돌아 오며 소리쳤다. “누가 나보고 잘못했다고 했어?”
노인이 시비 대상으로 나를 찾았다. 순간적으로 전의(戰意)가 온몸을 휘감았다. 어쭈, 이 영감탱이 봐라, 오늘 나한테 혼 좀 나봐라! “내가 그랬어요, 아니 버스를 전세 냈어요? 승객들은 안중에도 없습니까?” 기세등등했던 노인은 나를 보더니 갑자기 목소리를 깔았다. “나는 노약자예요, 넘어져서 다치기라도 하면 누가 책임질 거요?” “이보세요, 버스기사가 누가 노약자인지 어떻게 일일이 안단 말입니까? 버스도 타지 못할 정도면 보호자를 데리고 다니시든가 택시를 타든가 해야지, 애꿎은 기사가 무슨 잘못이며 우리 승객들은 뭡니까?”
노인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며 더 이상 시비를 걸지 않고, 빈자리에 앉아 앞자리의 학생을 붙잡고 무언가 말하고 있었다. 70대로 보이는 그 노인은 비교적 날씬한 체격에 별로 노약자로 보이지는 않았으나 걸음걸이는 다소 부자연스러웠다. 당시 내 모습이 험상궂어 보였는지도 몰랐다. 염색하지 않은 머리는 자신처럼 반백이지, 며칠 면도하지 않아 거친 턱에는 희끗희끗한 수염도 보이지, 잘못 건드렸다가는 망신당하겠다고 생각했을까. 학생들을 비롯한 승객들이 보내는 응원의 눈길을 느꼈다.
사실 하차용 출입문 맞은편에 앉아있던 나는 그 노인이 버스에 오를 때부터 쳐다보고 있었다. 뒤에 자리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어떤 학생 옆에 서서 학생을 일어나게 만들었다. 아무리 상대가 어리고 아무리 작은 피해라고 하더라도 누군가에 불편을 주는 노인이 처음부터 곱게 보이지 않았다. 나이 든 게 자랑이나 부끄러움은 아니지만 벼슬은 더더욱 아니다. 늙었다는 것은 죽음이 가까웠다는 뜻이고, 젊었다는 것은 앞으로 살아갈 날이 많다는 의미다.
젊었을 때 좋은 세상을 만들겠다는 의지로 군사독재와 싸우고 민주주의 운동을 했던 것처럼, 그들이 원하는 세상을 만들어가도록 젊은이들을 도와주는 게 나이 든 사람으로서의 역할이자 사명이라고 믿는다. 나이를 무기로 상식에 벗어난 행동을 한다거나, 자신의 생각을 윽박지르고 고집하는 것은 추태에 불과하다. 소위 태극기 집회에 참가하는 노인들이고, 말도 안 되는 카톡 가짜 뉴스를 지인들에게 무작위로 보내는 노인들이 바로 그렇다.
4~50년 전만 해도 환갑잔치라는 것을 했었다. 장수의 기준이 60이었다는 뜻이다. 경험과 연륜이 최고의 자산이었던 과거 농경사회에서 60이면 자식들은 3~40살이 된다. 자신이 터득한 지식을 자식에게 물려주고 뒷방 늙은이가 되어 권위를 누렸던 것도 경험이라는 재산 탓이 컸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자식들은 부모에게 배운 농사지식으로 부모의 삶을 되풀이했다.
세상이 바뀐 지금의 노인에게서 젊은이들이 배울 것은 없다. 학교에서 배운 지식과 인터넷에 널린 정보로 무장한 젊은 사람들에게 노인은 골동품에 불과하다. 골동품이란 가치를 알아주는 이에게는 보물이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는 쓰레기일 뿐이다. 보물로 취급받을 것인지 쓰레기로 전락할 것인지는 스스로에게 달렸다.
노인을 너무 폄하하는 게 아니냐고 불편하신 분이 있을까 염려된다. 하지만 주위에는 점잖고 품위 있게 늙으며 보석과 같이 빛을 발하는 노인들이 훨씬 많다. 그런 분들과 함께하는 시간은 언제나 즐겁고 무언가 깨달음을 얻은 것 같아 흐뭇해진다. 교단에 선 교장이 훈시하듯 자신의 주장을 강요하지 않고, 나이가 어리다고 반말을 하지 않으며, 가방끈이 짧다고 혹은 가난을 이유로 무시하지 않는 것은 인품의 문제이지 나이의 문제는 아니다.
도대체 몇 살부터 노인일까? 사실 노인의 정의도 애매하다. 내가 어렸을 때 시골에서는 50대도 허리가 꼬부라진 노인이었고 환갑이 되면 어른이었다. 미국에서는 연금을 수령하고, 한국에서는 지공거사(지하철 공짜)가 되는 65세부터 노인이라고 생각했었으나 최근에 생각이 바뀌었다. 스스로 노인이라고 생각하면 나이와 상관없이 노인이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나는 65세가 되더라도 돈을 내고 지하철을 타고 연금수령도 늦출 생각이다. 왜? 나는 노인이 아니니까. 오늘도 새벽에 일어나 뛰었고 땀을 뒤집어썼다. 비 예보가 있어 늦잠을 자려고 했으나 새벽에 보니 안개만 잔뜩 끼었을 뿐 비는 내리지 않았다. 언제까지 뛸 수 있을까. 도저히 뛸 수 없게 되는 그날이 바로 노인이 되는 순간이다. 그때까지는 노인이 되기를 거부하겠다. 노인이라면 뛸 수 없을 테니까.
아직은 젊은가 보다, 버스에서 목청을 높인 걸 보면.
에고, 나이를 똥구멍으로 쳐 먹었나! 나이를 먹었으면 이놈의 성질을 죽여야 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