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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추조 Feb 14. 2018

최저임금과 해외여행

 한국으로 돌아와 살면서 만난 생소한 용어들이 있다. 이민을 떠나기 전에는 들어보지 못한 ‘최저임금’도 그중에 하나다. 몇 년 전 만해도 내가 최저임금을 받을 줄은 상상하지 못했었다. 언젠가 주유소에서 알바로 펌핑을 할 때는 당시의 최저임금도 못 받았다. 아마 주유소에서 제공했던 점심까지 임금에 포함하지 않았나 싶다. 참 야박한 사람들이었다.


 새해 벽두에 관심이 모아진 뉴스의 중심에 최저임금이 있었다. 작년에 비해 16.4%나 대폭적으로 인상된 시간당 7,530원이 영세업자들에게 큰 부담이 된다는 것이 요지였다. 그 부작용으로 각종 편법이 난무하고, 종업원 수를 줄이고, 음식 등 각종 서비스 요금을 인상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한다. 인상된 최저임금으로 하루 8시간, 한 달 20일 일하는 경우 120만 원 남짓한 월 소득이 된다.


 연초 어느 방송의 뉴스에 어떤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젊은이의 인터뷰가 나왔다. 인상된 급여를 모아서 여름에 해외여행을 가겠다는 희망을 피력했다. 뭐, 아르바이트생이라고 해서 해외여행을 가지 말란 법은 없다. 하지만 부모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학생들이 학비를 벌기 위해서 알바를 한다는 편견(?)이 깨지는 순간이었다. 요즘 젊은이들은 부모 세대는 기회가 많아 취직이 쉽지 않았느냐고 대꾸한다.


 그건 맞다. 우리 때 만해도 몇 개의 대기업에 합격해놓고 골라 갔다. 하지만 대기업에 다녔어도 해외여행은 꿈도 못 꿨다. 월급을 달러로 환산하면 200불에서 300불 정도였다. 그때는 환율도 700원대였는데도 그랬다. 지금도 대기업에서 천 불 대로 임금을 지급한다면 채용인원을 현재의 몇 배로 늘려서 청년실업이라는 말은 사라지지 않을까.


 그때로 돌아가자는 말은 아니다. 포인트는 누이 좋고 매부도 좋은 일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임금이 높아지면 일자리가 줄어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현상이다. 생산지를 저임금 국가로 옮겼던 미국도 그랬고, 그런 미국 덕분에 일자리가 많아졌던 한국이라고 다르지 않다. 미국의 경우 최저임금을 받는 3대 직종이, 캐시어, 딜리버리, 웨이추리스다. 최저임금을 올리니 캐시어는 셀프 첵 아웃을 할 수 있는 모니터와 스캐너로 바뀌고, 딜리버리는 드론으로 대치되고, 웨이추리스는 로봇으로 대체하기 위한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아무리 최저임금이 오르더라도 가진 자들, 힘 있는 자들은 자신의 이익이나 소득을 힘없는 사람들과 나누고 싶어 하지는 않는다. 아흔아홉 마지기 논을 가진 사람이 한 마지기 가진 사람의 논을 뺏어 백 마지기를 채우고 싶어 하는 것이 인간의 욕심이기 때문이다. 자본의 투자로 매장에서 캐시어가 사라지고, 자율주행, 드론, 로봇이 최저임금을 받는 노동자를 대체할 날도 머지않을 것이다. 자본가들이 부를 나누는 데는 인색해도 자신들에게 더욱 많은 부를 축적하게 만드는 기술에 적극 투자할 것이다.


 학자들의 반론도 만만치 않다. 새로운 기술이 일자리를 줄이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일자리를 창출한다는 논리가 그것이다. 50년 전에는 프로그래머나 펀드매니저 같은 일자리가 없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런 직종은 고학력자로 경쟁에 이긴 사람들을 위한 일자리일 뿐, 경쟁에 뒤처진 사람의 삶은 더욱 피폐해지고 비참해질 수밖에 없다.


 지난 30년 이상 IT에 종사한 사람으로서 예측할 수 있는 것들이 있다. 저임금 노동력을 대체하기 위한 기술의 발전은 차츰 중산층과 고급인력의 일자리까지 침범할 것이라는 추측이다. 미국에서 중산층 3대 직종은 경찰, 교사, 간호사로 알려져 있다. 정형적이고 반복적인 이런 직종도 얼마든지 인공지능과 로봇의 발전으로 대체 가능하다. 의사나 변호사 같은 전문 직업도 마찬가지다. 빅데이터와 인공지능으로 대체 가능하다. 단지 시간이 문제일 뿐이다.


 대기업에 다니는 조카가 작년에 받았다는 연봉은, 내가 그 나이에 받았던 연봉의 10배가 넘었다. 하지만 34~5년 동안의 인플레는 10배가 훨씬 넘는다. 핵심은 다른 나라의 임금은 그렇게 오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35년 전에 내가 갔던 미국 회사 엔지니어들의 임금은 우리 7배였지만 지금은 거의 차이가 없다. 오히려 미국 중소도시의 중소기업에서 일하는 노동자보다는 한국의 대기업 직원이 더 많이 받는지도 모른다.


 고용주가 아닌 고용된 노동자로서 임금이 많다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고 좋은 일이다. 그러나 산이 높을수록 골은 깊고, 햇빛이 강할수록 그림자는 짙어진다. 60대 아파트 경비원이 쫓겨나고 집단자살과 고독사가 빈번해지는 것은 짙어진 음영이 드리워진 결과다.


 교복자율화로 획일화에서 해방되고 단체급식으로 불평등을 경험하지 못했으며 디지털 문명과 함께 성장한 70년대 이후 출생자들을 ‘신인류’라고 부른다. 그들은 생활방식뿐만 아니라 생각까지도 우리와는 전혀 다르다. 우리의 낡은 사고로 그들을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비록 알바를 하더라도 남들과 같이 해외여행을 가야 하고, 아이폰이 새로 나오면 마이너스 통장을 사용하더라도 사야 한다. 그것을 위해 결혼이나 출산을 포기해야 한다면 기꺼이 포기한다. 때로는 삶까지도 포기하는 그들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유일한 해법은 정치다. 이유를 불문하고 자본에게 세금을 많이 물려서 복지를 확대하는 길만이 해결책이다. 합법적으로 세금을 포탈하기 위해 버뮤다에 페이퍼컴퍼니를 세우고, 새로운 아이폰을 더 많이 팔기 위해 구형 아이폰의 성능을 떨어뜨리는 비도덕적이고 비양심적인 행위를 하는 애플을 보면, 자본에게는 기대할 게 별로 없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도널드 트럼프 같은 사람과 이명박 같은 인물이 다시는 대통령이 되어서는 안 된다. 미국의 공화당이나 한국의 자유한국당 같은 기득권층이 권력을 잡아서도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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