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저처럼 저급한 수컷들에 대한 이야기로 고매한 분들은 해당되지 않는 글이라는 것을 먼저 밝힙니다. 저는 남성우월주의자도 아니지만 페미니스트도 아니어서 여성분들에게는 불쾌한 단어나 내용이 있을 수 있다는 것도 미리 알려드리며 가급적 읽지 마시기를 권합니다. 한심한 수컷의 음담패설에 불과할 수도 있으니까요. 또한 가급적 어감을 살리기 위해 상스런 단어를 그대로 사용했다는 것도 미리 이해를 구합니다.)
인간의 경우 여성이 생물학적으로는 우성이라는 것이 학자들의 지배적인 견해다. 그것에 대한 첫 번째 증거로 색맹이나 혈우병과 같이 남성에게만 나타나는 유전병이다. 또한 인위적 조작이 없는 상태의 남녀 출생성비는 103:100으로 조사되는데 이들이 결혼연령에 도달하면 1:1로 된다고 한다. 즉, 질병에 취약한 남성이 더 많이 죽기 때문인데 평균수명에 있어서도 여성이 5~7년 더 오래 산다.
고등학교 생물시간에 배웠듯이 인간의 염색체는 성염색체를 포함 23쌍으로 구성된다. 이중 남성 염색체 ‘y’는 실제 크기에 있어 ‘x’의 절반에 불과하다. 학자들은 이 차이가 여성이 생물학적 우성인 요인으로 짐작할 뿐 논증된 정설은 아니다. 여기서도 조물주의 심술(?)이 엿보인다. 생물학적 우성인 여성이 태어난 이후에는 – 적어도 최근까지는 – 완력에 있어서 약자로 존재한다는 모순이 그렇다. 이렇듯 우열을 나눠가짐으로써 균형을 잡으려는 조물주의 깊고 깊은 섭리를 우리 피조물이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이런 아이러니는 또 있다. 우리 세대는 어렸을 때부터 성차별을 늘 경험하며 살았다는 것을 부인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다시 과거로 돌아가 보자. 어머니는 가난했던 시절 쌀보다는 보리나 콩, 팥 같은 잡곡을 더 많이 섞어서 밥을 지었다. 맨 위의 쌀밥은 아버지와 내 몫이었다. 여동생이 먹는 밥에는 쌀보다 잡곡이 많았고, 엄마는 바닥에 깔린 보리 누룽지로 끼니를 때웠다. 지금의 문재인 대통령 누나는 본인이 공부를 잘했음에도 불구하고 동생을 대학에 보내기 위해 자신을 희생했다. 가부장적 사회였다는 핑계는 있으나 남성이 우월하다는 사고를 심어준 당사자가 어머니나 누나 같은 여성들이라는 건 아이러니다.
첫 아이로 쌍둥이를 가졌을 때 일부러 아이의 성별을 물어보지 않았다. 1984년 당시에 태아의 초음파 검사로 여아일 경우 유산시키는 것이 신문지상에 오르내리며 남아선호 사고가 지배하던 시절이었으나 아들이든 딸이든 상관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수술실 앞에서 아이의 출산을 기다리는데 간호사 나오며 ‘둘 다 딸이에요.’ 라며 냉정하게 말했을 때 장모님이 내 어머니에게 죄송하다며 사과했던 것은 지금 생각해도 웃음을 자아낸다. 그 아이들이 없었다면 인생이 얼마나 삭막했을까.
가장 약소국이었던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것에도 재미있는 사실이 가려져있다. 한민족 5천 년 역사 중에 여왕이 존재했던 유일한 왕국이 신라였다. 선덕과 진덕여왕 같은 성군도 있었고, 음란했던 진성여왕이 나라를 망하게 했고 성골이라는 골품제도 때문이라고 하더라도 성차별이 덜했던 사회라는 것을 증거 하고, 그것이 결국 통일로 이끌었지 않았나 하는 역추적도 가능하다. - 이런 관점으로 역사를 바라보는 글은 아직 읽은 적이 없다.
이런 역사적 추적은 유럽의 제국주의 시대에서도 가능하다. 한때 전 세계 해상을 주름잡았던 영국, 스페인, 네덜란드는 여왕이 존재했던 국가였다. 반면에 프랑스와 독일은 달랐다. 만약 인류 역사에 성차별이나 아들의 서열에 차별을 두지 않고 가장 총명한 자식에게 왕권을 물려준 국가가 있었다면 아마 세계를 통일하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도 이런 이유로 가능하다. 성이든 인종이든 나이 든 모든 차별이라는 행위는 비효율적이며 비능률적일 뿐만 아니라 인류의 발전에 부정적으로 작용해왔다.
그런 점에서 240년의 민주주의 역사의 미국에서도 갖지 못한 여성 대통령을 불과 70년의 일천한 민주주의에서 가졌다는 사실은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한국이 대단하다는 의미다. 물론 오바마가 당선되었다고 해서 인종차별이 사라지지 않은 것처럼, 여성 대통령 출현이 성차별을 없앴다는 뜻이 아니라고 해도 한국인의 사고가 미국인이나 일본인보다는 유연한 것만은 확실하다. 성별에 대한 조물주의 장난(?)은 그것뿐만이 아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친구나 친인척의 가정을 보면 성별이 크로스로 유전되는 것을 본다. 반드시 그렇다는 것은 아니지만 대체적으로 아들이 모계를 닮고 딸이 부계의 외모나 성격을 유전하는 경향이 흔하다는 거다. “난 자라면서 아빠 성격이 정말 싫었거든. 그런데 친구들이 그러더라. 내가 아빠를 그대로 빼닮았다는 거야. 정말 그런가?” 두 딸로부터 자주 듣던 말이다. 아들을 볼 때 가끔 드는 생각은, ‘어쩌면 제 외가를 그렇게 빼닮았을까?’라는 경이로움이다. 동의하는 다른 분들이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이에 대한 사례는 주위에 너무 흔하다. 그렇다면 왕위를 성차별로 아들에게만 물려준 왕들은 정말 바보들이었던 셈이다.
안희정 도지사의 성폭행 뉴스를 보고 떠올린 글감이 본론에서 많이 빗나갔지만, 성에 따른 생물학적 차이는 인정할 수밖에 없으나 성차별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를 나름의 논리로 전개하려다 엉뚱하게 흘렀다. 도지사와 비서, 국회의원과 보좌관, 교수와 제자, 감독이나 연출가와 배우, 원로문인과 신인, 상사와 부하와 같은 수직적 관계에서 나타나는 폭력은 성별에 관계없이 일어나는 갑질이라고 볼 수도 있다.
수컷 – 이성(理性)이 욕정에 휘둘린다면 짐승에 가깝다는 의미 외에 다른 뜻은 없으며 영어로는 ‘Male’이다. - 에게 당하기 때문에 성추행이나 성폭력이 된다. 지난 과거를 돌이켜보면 상사의 업무지시나 언어에 의한 폭력은 한국이나 미국 모두에서 경험했다. 여성이었다면 얼마든지 성추행이었을 수도 있었다. 그들에게 저항도 했다. 소위 말해서 들이받았던 결과는 참담했다. 한국에서는 최하점의 인사평가를 받았고 미국에서는 레이오프 되었다. 그게 강자와 약자와의 관계이고 약육강식의 세상 이치다.
어렸을 때 들었던 엄마의 명언을 되살리면 안희정은 세 번째 뿌리를 잘못 놀렸다. 그 결과 52년간 쌓은 그의 공든 탑은 일순간에 무너졌다. 김 지은 씨 외에 피해자가 또 있다는 뉴스도 있으나 논리를 단순화하기 위해 김 씨에게 국한시켜보자. 지난 8개월 사이에 4번의 관계가 있었다고 한다. 50대인 안 지사의 성욕을 탓할 수는 없다. 그것을 처리하는 방법이 문제였다. 욕실에서 샤워하면서 혼자 처리했으면 아무 탈이 없었다. 김 씨에게 성욕이 일어났다면 그녀를 상상하면서 처리하면 된다. 사람의 상상까지 법으로 다스리는 나라는 없다. 그렇게 해서 8개월 동안 4번만 지나치면 되는 것 아닌가.
김 씨에게 대한민국 국민은 빚을 졌다. 그녀의 폭로가 없었더라면, 그래서 안 지사가 4년 후 대통령이라는 직책에 올랐다면 성욕 하나 다스리지 못하는 자가 어떤 실정을 저지를지는 너무 뻔하다. 일개 도지사 자리에서도 성욕 하나 어쩌지 못해서 인권을 유린했으니 말이다. 그의 위선과 비겁함은 지탄의 대상이 되어 마땅하고, 김 지은 씨의 인생을 건 용기는 칭찬을 받아야 한다. 더러운 위선자로부터 나라를 구했으니 그보다 더한 애국 행위는 없다.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