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과학자들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권력을 가지면 뇌가 달라진다고 한다. 미국 UC버클리의 대처 켈트너 교수는 ‘권력에 빠진 사람의 행동은 전두엽이 손상된 환자와 비슷하다’고 주장했다. 그렇지 않고는 재벌 3세인 대한항공 조현아 부사장이 땅콩 때문에 비행기를 돌린 미친 짓을 이해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이 바로 권력이다. 연간 4천만 원 이상을 소비해야 자격이 되는 현대백화점 자스민 회원은 무료 발레파킹과 회원 전용 라운지 이용까지 제공받는 특권을 누린다. 살던 강남 현대아파트를 팔아 자식들 집을 마련해주고 산본으로 이사 갔던 어떤 분이 자스민 회원 특권을 잊지 못해 전세를 구해 강남으로 되돌아왔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몇 년 전 주차요원을 무릎 꿇린 사건으로 유명해진 무개념 모녀도 자스민 회원이었다.
최순실의 국정농단을 폭로한 노승일 씨에 의하면 그녀는 자신이 부리는 사람들이 마음에 안 들면, ‘머리는 무겁게 뭐 하러 달고 다니느냐?’고 막말을 했다고 한다. 대통령 빽을 가져서 그랬을까 돈이 많아서 그랬을까. 조현아 부사장이나, 현대백화점 무개념 모녀나, 최순실 같은 여성들의 갑질도 수컷들 못지않다는 증거다. 권력이 생기면 예삿일에도 짜증을 내고 자신이 가진 특권을 드러내고 싶은 욕망은 성별과 상관없는 일이다.
1994년 베스트셀러 작가 ‘Michael Crichton’이 발표한 ‘Disclosure(폭로)’라는 소설이 있다. ‘Michael Douglas’와 ‘Demi Moore’가 주연한 영화의 줄거리는 새로 부임한 고위직 여성이 과거의 연인이었던 부하직원 남자를 위계에 의한 성추행이 주 내용이다. 언젠가 페미니즘이 완전하게 실현되는 날에는 현실이 될지 모르지만 24년 전에 이미 그런 소재의 소설이 있었다. 유부남인 친구에게 들은 말이 생각난다. 여자들이 자자고 달려드니까 도리가 없었다는 이야기다.
1999년에 세계적인 기업 HP에서 칼리 피오리나(Carly Fiorina, 1954~)가 최초의 여성 CEO에 오르자 그녀의 재혼한 남편 프랭크는 전업 남편(House Husband)이 되어 육아와 살림에 전념한다. 성차별이 아니라 성 평등의 완성이다. 이처럼 성 평등이 완벽하게 실현되면 disclosure가 픽션이 아니라 현실이 되는 날도 멀지 않을 것이다.
고교 절친에게 들은 이야기다. 1980년에 미국 중서부로 이민 온 친구는 결혼 6개월 만에 이혼을 경험하고 40대 중반까지 혼자 살았는데, 나와는 달리 남성적 매력이 넘쳐서 여성들에게 인기가 많았던 친구다. 한때 그의 여자 친구 겸 잠자리 파트너 L 씨는 고등학생 때 사촌오빠에게 겁탈당했다. 사고로 일찍 돌아가신 아버지 제삿날 큰집에서 큰아버지와 사촌오빠가 왔는데 여느 제사처럼 자정에 지내고 깊은 잠에 빠졌을 때 명문대에 다니던 사촌오빠에게 당했다.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세상에서 그녀와 그녀의 엄마, 그리고 사촌오빠라는 개새끼 셋뿐이었다. 엄마가 울면서 말했다. 너는 무슨 일이 있어도 한국 놈과는 만나지도 말고 결혼하지도 말라고. 엄마의 당부대로 미국인과 결혼해서 미국으로 왔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한국 남자가 몹시 그리웠던 그녀는 내 친구를 선택했다. 친구 집에서 자고 갈 때 때때로 샤워하지 않고 그냥 간다. 체취를 오래 간직하고 싶다는 게 이유다. 그녀가 친구에게 말했다고 한다. 그 개새끼는 대학을 졸업하고 지금도 한국에서 잘 나간다고, 그래서 세상에 정의란 없는 것 같다고. 20여 년 전에 이 기막힌 사연을 듣고 언젠가 이야기로 엮어보려고 생각했었다.
한국에서 벌어지는 성폭행 중에 친족, 그중에서도 사촌오빠에게 당하는 게 가장 흔하다고 오늘 JTBC 뉴스룸에서 전했다. 이 비슷한 이야기는 옛날에도 어디선가 읽거나 본 기억이 있다. 한국의 가부장적 사회, 남성 중심의 사회가 수컷을 양산했다는 근거다. 하지만 세상은 변했다. 호적제도가 사라졌고 가부장제도도 옅어졌으며, 대가족제도는 붕괴되었고 부모봉양도 옛말이 되었으며, 완력이 필요한 세상이 아니라 두뇌를 사용하는 세상이 되었다. 아직도 옛날처럼 사촌에게 강간당하고 상사에게 당하는 폭언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회사에서 성추행을 당하는 일은 없어지는 것이 자연스럽다.
오히려 소설 Disclosure가 현실이 되는 세상이 올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한국에서는 국방의 의무가 없는 여성이 남자들보다 훨씬 유리하기 때문이다. 나는 대학 3학년 때 고시 1차에 합격하고 4학년 때 2차에 떨어지는 바람에 할 수 없이 군대에 갔고 결국 포기했다. 만약 군대에 가지 않았다면 계속 공부해서 합격할 가능성이 많았다. 나를 따라다니며 어떻게 공부하느냐고 묻던 후배 여학생은 1년 재수해서 합격했다.
학교, 문학, 영화, 정치, 예술 등 곳곳에서 터져 나오는 ‘#MeToo’운동을 보고 세상이 변하는 과도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과학과 IT 기술의 발달로 세상은 급속히 변하는데 아직도 가부장적 사고에 집착하는 수컷들이 있고, 돈과 권력을 지닌 인간들은 평범한 사람들을 개·돼지로 취급하며 군림한다.
과도기는 새로움을 동반하는 창조적 시기다. 과도기에는 종종 알지 못했던 생명력이 발휘되고 더욱 강렬하게 느껴진다. 과도기는 인생 가운데 만나는 ‘시적(詩的)인 지대’다. 과도기를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우리 삶의 질은 무척이나 달라진다. - 나탈리 크납의 ‘불확실한 날들의 철학’에서 인용한 글이다.
문제는 우리 민족의 ‘냄비근성’이다. 한때 그토록 유행했던 ‘웰빙’이니, ‘헬조선’이니 하는 단어를 요즘은 찾아 볼 수 없다. ‘#MeToo’운동도 그렇게 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3년 전 동남아 여행을 하면서 만난 사람들에게 들은 내용이다. 요즘의 과도기를 거쳐 세상이 어떻게 바뀔지 상상하는 것은 읽는 분들의 몫이다.
- 라오스 방비엥에서 만난 40대 초반의 친구사이 두 남자들: 중학교에 다니는 딸을 데리고 사는 이혼남과 필리핀에서 여행사를 하는 미혼남, 이 둘은 동남아를 여행하면서 가는 곳마다 여자를 산다고 했다. 왜 재혼하지 않느냐는 질문에는, 여러 유부녀들을 만나 연애하며 즐기며 사는 게 더 좋다고 답했다. 여행사 친구는 결혼하기 싫은 이유가, 10년 이상 연애한 여자 친구가 다른 남자와 결혼해서 5~6개월 만에 아이를 낳는 것을 보고 여자에 환멸을 느꼈다고 말했다.
- 베트남 사파에서 만난 영국 백인 여성: 30대 후반의 미혼여성은 6개월째 세계를 여행 중인데 매력적인 남자를 만나면 동침을 한다. 괜찮은 인도인을 만나서 키스하려는 순간 입에서 나는 카레 냄새를 참을 수 없어 라스트 미닛에 거절했다.
- 태국 방콕에서 만난 50대 중반 한국 남자: 한국 IBM에 다니다 30대 중반에 그만두고 전 세계를 여행하며 일생을 보냈다. 과거에는 친구들이 결혼도 안 하고 자유롭게 사는 자신을 많이 부러워했다. 그러나 20년이 지난 지금은 후회스럽다. 친구들은 며느리나 사위를 본다는데 자식도 없는 자신은 가진 것도 남은 것도 없어서 외롭다.
인생에 정답이 있을까요?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