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랫 꽃섬
잔뜩 기대를 갖고 본 영화가 그저 그렇고 별 기대 없이 본 영화가 뜻밖의 감동으로 기억에 오래 남을 경우가 많다. 개인의 취향에 따라 다르겠지만 내 경우에는 아카데미 최다 수상작으로 명성이 자자했던 ‘양들의 침묵’이 전자의 경우였고, 대학생 시절 3류 극장으로 동시상영관이었던 용산극장에서 보았던 ‘말이라 불린 사나이(A man called a horse)’와 ‘람보’는 후자에 속했다.
여행이나 관광도 비슷해서 명성이 자자한 그랜드캐니언보다는 브라이스 캐니언이 내 경우 더 인상적이었다. 그렇다고 그랜드캐니언이 그저 그렇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 광대함에는 벌려진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으나 그것 외에는 볼거리가 별로 없다는 의미다. 일생에 한 번은 꼭 가봐야 할 곳이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으나 너무 유명한 탓에 수많이 접한 정보가 경이로움을 반감시킨 것 또한 부인하기 힘들다. 반면에 브라이스 캐니언은 별 정보 없이 갔기에 더 놀라웠을 것이 틀림없다.
명성에 걸맞게 뛰어났던 곳은 베트남의 하롱베이였고 그보다 더 놀라웠던 곳은 창안이었는데, 창안이 하롱베이보다 굉장했다기보다는 들어본 적이 없던 곳이었다는 것이 더 큰 원인이었을 거다. 라오스에서 모터보트로 통과하는 데만 30분이 걸렸던 동굴도 사전 정보가 거의 없어서 더 놀라웠다.
작년 추석에 동생이 조카를 데리고 여수를 방문했을 때 애초에는 금오도 비렁길을 걸으려고 나섰으나 백야선착장에 도착하니 백야도 출발 금오도행 배가 귀성객 수송을 위해 여수항 출발로 바뀌는 통에 하는 수없이 ‘꿩 대신 닭’으로 찾아간 곳이 하화도(下花島, 아랫 꽃섬)이었다. 빨리 걸으면 두 시간이면 충분한 비교적 짧은 거리에도 오르막과 내리막이 반복되어 적당히 땀도 났을 뿐 아니라, 작은 섬이라 사방이 트인 탓에 경치가 더없이 좋았다. 동행한 동생과 조카도 즐거워했다.
3 무(三無)의 바다라는 하롱베이와 유사하게 바다라면 마땅히 있어야 할 파도와 갈매기가 보이지 않았고 바다 냄새가 없었으며 많지는 않아도 군데군데 알록달록 핀 이름 모를 꽃들과 출렁다리까지 인상적이었다. 한국의 남해안 같은 곳을 다른 나라에서 본 기억도 없지만, 세계 어느 이름난 관광지에 견주어도 손색이 없다는 생각을 늘 갖게 만든 섬이었다.
이달 초에 몇몇 분들과 함께 다시 찾으려 했으나 불운하게도 날씨가 훼방을 놓았다. 작년에는 가을이었지만 봄이 되면 다시 가보겠다는 고집은 기어코 이웃을 유혹하게 만들었다. 오늘 아침 여수에 사는 이웃 가족들과 8시 하화도행 배에 올랐다. 날씨는 더없이 좋았고 하늘은 미세먼지는커녕 티 하나 없이 맑았다. 걷기에는 다소 약한 바람이 유일한 흠이었다.
트레킹이지만 어슬렁거리듯 산책처럼 천천히 걸으면서 귀를 간지럽히는 새소리와 코를 상쾌하게 만드는 풀냄새, 땀으로 촉촉한 이마에 부드럽게 감기는 바닷바람을 즐겼다. 두 시간 반의 트레킹이 끝나고 구멍가게 밖에 놓인 테이블에서 달달한 막걸리와 회무침을 곁들여 이웃이 준비해온 김밥으로 점심을 먹으며 돌아가는 배편을 기다렸다. 에어컨을 설치하러 온 기술자로 보이는 옆 테이블 젊은이들이 남았다며 건네준 멍게에서는 바다내음이 싱그러웠다.
1시 40분 배를 타고 집에 오니 3시다. 슬로 라이프를 추구하는 은퇴자의 하루 소풍으로는 더없이 적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