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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추조 May 09. 2018

친구의 재해석

친구의 의미

 친구란 무엇일까? 살아계신 부모는 없어도 친구 없는 사람은 없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은 말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성별과 나이를 불문하고 누구나 친구를 사귄다. 부모, 형제라는 단어와 함께 친구라는 어휘도 정(情), 추억, 사랑, 따뜻함, 어린 시절과 같은 좋은 감정을 동반한다. 소꿉친구, 동네친구, 학교친구, 군대친구, 사회친구로 이어진다. 심지어 교도소친구도 있다.


 친구의 어원을 보자. ‘親舊’의 ‘親’의 의미는 ‘가깝다’이고 ‘舊’는 ‘오래’라는 뜻이니까, 친구란 오래된 가까운 관계의 사람들이 서로를 부르는 호칭이며, 동의어로는 ‘동무’와 ‘벗’이라는 순수 한국말이 있다. 어감상 으뜸인 ‘동무’는 초등학교 1, 2학년 때 우리 세대가 부르던 동요에 자주 등장했던 단어이나, 북한의 공산당원 호칭으로 사용되면서 지금은 거의 죽은 언어가 되었다.


 ‘친구’라는 단어가 가장 많이 사용되기는 하지만 ‘벗’이라는 어감도 귀에 감기기는 동무에 버금간다. 순수한 우리말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말’, ‘글’, ‘술’과 같은 우리말과 어울리는 것도 ‘친구’보다는 ‘벗’이다. ‘말벗’, ‘글벗’, ‘술벗’이 ‘말친구’, ‘글친구’, ‘술친구’보다는 자연스럽게 들릴 뿐 아니라 느낌까지 친근하다.


 학창 시절 진리라도 되는 양, 자주 회자되던 친구에 대한 말이나 속담이 있다. ‘고등학교 때 사귄 친구가 진짜 친구이고, 사회에서는 친구 만들기가 힘들다’ 거나 ‘술과 친구는 오래될수록 좋다’는 것들이다. 철없을 때보다는 어느 정도 사리분별이 가능할 때 사귄 친구가 더 좋다는 논리가 그럴듯하고 친구라는 어원을 생각할 때도 부인할 수 없다.


 특히 30대 이후에는 친구 만들기가 힘들다고 공공연하게 인정한 1950년대 사회학자들은 ‘①접근성 ②지속적인 만남 ③계획하지 않은 교류’의 세 가지를 친한 친구를 만드는 조건으로 제시했으며, 이 조건을 충족하는 친구는 고등학교나 대학시절에 만들어진다고 주장했다.(출처: 위키백과 '친구')


 접근성이 없으면 지속적으로 만나기는 곤란하다는 점에서 ①과 ②는 서로 보완적이며 필수불가결이다. 이웃사촌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세 번째 ‘계획하지 않은 교류’란 이해타산이 없는 관계라고 볼 수 있다. 아무런 사전 준비나 계산 없이 아무 때나 찾아가서 같이 밥을 먹거나 술을 마시고, 길을 걷고 대화하며 서로의 마음을 읽고 쓰는 관계라는 의미일 것이다.


 학자도 아닌 주제에, 더군다나 사회학을 전공하지도 않은 필부 주제에 어느 것에도 이의가 있을 수 없다. 단지 1950년대 태어나 컴퓨터와 인터넷이 일상화된 정보화시대를 산 사람으로서 그렇지 못한 시절에 제시된 이론에 대한 문제점 제기, 논리적이고 학구적인 접근이 아닌 경험에 의한 이론(異論)만큼은 제기하고 싶다.


 - 현대는 좁고 깊은 지식이 필요한 극도로 전문화된 사회다. 형제라 하더라도 전공과 하는 일이 다르면 대화가 쉽지 않고 친구하고 할지라도 직업이 다르면 서로의 처지를 이해하는데 요구되는 소통이 어렵다. 직업이나 직종에 따라 정치적 견해도 다르고 사회를 보는 눈도 달라진다. 예를 들어, 토목이나 건축업종에 종사하는 사람은 이명박 정부를 칭송했지만, 환경이나 자연친화적 직업군은 저항했다. 현대건설 간부인 형과 산림청에 근무하는 동생 사이에 갈등이 생길 요인은 언제나 존재한다.


 - 미래학자 ‘엘빈 토플러’가 40년 전 예언했던 ‘제3의 물결’이 도래한 시대에서, 모든 가치관이나 기존의 개념이 흔들리고 변하고 있듯이 친구라는 고전적 정의도 바뀌어야 할 시점이다. 일정기간 대량의 노동력이 요구되었던 농경시대도 아니고, 8촌까지 한마을에서 부대끼며 살던 대가족제도도 사라진 지 오래다. 그런데도 과거와 변함없이 친구의 개념을 지킨다는 것은 양복을 입은 채 상투를 틀고 짚신을 신은 것과 다름없다.


 - 이민을 생각해본 사람이 많다고 하더라도 보통사람이 일반적으로 행하는 행위는 아니다. 또한 이민자라고 해서 전부 고국으로 돌아올 생각을 하는 것도 아니다. 경험자의 고민을 미경험자가 이해하기 힘들 듯, 이민자의 고충을 일반인이 접근하는 것도 쉽지 않다. 이민자가 아니면 이해하기 힘든 공감대가 있으며, 역이민을 생각해본 사람만이 공감할 수 있는 영역도 존재한다. 소통할 수 있는 공감대가 있는 관계가 바로 현대적 의미의 친구가 되어야 한다.


 한 달쯤 전이다. 미국 동부에 사는 분이 짧은 한국 방문의 시간을 쪼개어 찾아왔다. 저녁에 약속 장소인 식당에 들어서니 세 분이 기다리고 있었다. 인터넷 카페에서 서로 공감하는 글로는 만났어도 처음 보는 그분은 하동에 거주하는 고모님 댁을 방문했다가 억지로 짬을 낸 것이었다. 고모 내외분은 시간도 없으면서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만나러 그곳까지 찾아온 조카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느낌을 받았고 그분들을 이해시키기 위해 주섬주섬 꺼낸 말이었다.


 “하하하, 시청에 용무 보러 왔다가 일이 금방 끝났습니다. 점심이나 같이 할까요?”

 어제 비염치료 때문에 동네 이비인후과에 걸어서 갔다가 처방전을 들고 약국에 들렸을 때, 금오도 박 선생에게 걸려온 전화였다. 30대는커녕 60대에 만난 분이지만, 지난 1년 간 수시로 전화하고 만나고 있다는 점에서 접근성, 지속적인 만남, 계획하지 않은 교류 세 가지 조건을 다 갖추고 있으니 이보다 즐거운 만남이 없다.


 김치찌개를 놓고 소주를 두 병이나 비우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비염에 안 좋다며 술을 먹지 말라는 간호사의 충고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박 선생은 이번 대학을 졸업한 아들이 졸업식장에서 딸과 함께 찍은 사진을, 나는 애인과 같이 찍은 아들 사진을 휴대폰으로 보여주었고 식사 후에는 근처 시장으로 걸으며 웃고 대화했다. 같이 금오도에 가자는 우정 표시에는 다음 주에 가겠다는 말로 대신했다.


 엊그제 인터넷 카페를 통해 알게 된 두 분이 찾아왔다. 특히 한 분은 카페 초창기부터 격려와 응원을 아끼지 않았던 분이었으나 직접 만나기는 처음이었다. 비행기로 열댓 시간이나 걸리는 물리적 거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비록 인터넷이라는 사이버 공간이지만 접근성과 함께 지속적인 만남은 물론, 계획하지 않은 교류까지 틀림없으니, 30대는 아니더라도 친구로서 모든 조건을 갖춘 셈이다.


 항상 받기만 할 뿐 되돌려 줄 게 없다는 불편함이 있기는 하다. 이번에도 양주에 영양제까지 받았다. 카페에 올리는 내 사진에 항상 같은 옷만 보인다며 등산복을 건네는 다른 분의 마음 씀씀이에는 할 말을 잃었다. 자신은 아직 돈을 벌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분들에게 지고 말았다. 집 근처에 있으나 은퇴한 가난한 글쟁이로 지나만 다녔던, 네온사인이 번쩍이는 ‘소호회센터’에서 자연산 회를 저녁으로 선택했던 것도 그런 친구 덕분이다.


 세 가지 친구의 조건을 제시한 사회학자의 주장에 따르면 30대 이상에서 친구를 사귀기 힘든 이유에 직업과 소득의 차이가 있다. 돌이켜보면 학생 시절의 친구에는 빈부를 따지지 않았다. 부모가 돈이 많은 것이지 본인이 돈 많은 것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50년대 사회학자의 주장은 틀렸다. 물리적인 접근성이 전혀 없더라도 인터넷 세상에서는 잦은 만남이나 지속적인 교류가 얼마든지 가능하고, 빈부의 차이가 있더라도 친구가 될 수 있다. 그들이 놓친 것은 소통이 된다는 것, 즉 공감대의 중요성이다.


 그분들과 저녁을 먹는 중에 딸에게서 전화가 왔다.

 “아빠, 지난 토요일 정식으로 프러포즈받았어.”

 결혼한 지 5년이나 된 아이도 있는데 다른 쌍둥이는 감감무소식이었다. 그런 아이가 프러포즈를 받고 반지를 꼈다니 이보다 반가울 수 없다. 서른을 훌쩍 넘는 자식을 둔 아비로서 아이들이 연애한다는 사실보다 달콤한 소식은 없다. 더군다나 경제적으로 아무 도움도 줄 수 없다는 자격지심 때문에 더하다.


 좋은 분들과 함께 다니며 맛있는 음식을 먹고 신나는 소식을 들었으니 더 이상 행복할 수 없는 하루였다.


▼ 여수 오동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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