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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추조 Jul 05. 2018

그대의 불행은 나의 행복

 ‘쁘라삐룬’이라는 이상한 이름의 태풍이 한반도를 비껴 지나갔다. 서해상으로 지나갈 것이라는 처음 진로 예측은 하루 만에 여수로 바뀌었다가, 점점 동쪽으로 이동하더니 결국 일본의 대마도를 스치며 지나가는 바람에 태풍의 왼쪽에 위치한 한반도의 피해는 줄고, 오른쪽 일본 측의 피해가 더 커졌다. 왼편은 편서풍이 바람의 속도를 줄이는 작용을 하는 반면, 반대편은 바람을 가속시키는 효과 탓이다.


 만약 애초 예상대로 태풍이 진행했다면 일본은 영향을 받지 않고 한반도의 피해는 굉장했을 것이다. 한반도 측에서는 그나마 다행이었으나 일본으로서는 태풍의 진로를 바꾸게 만든 북쪽의 차가운 대기가 원망스러웠을지도 모른다.


 월드컵 조별리그 마지막 경기에서 한국의 승리는 독일에게는 보탤 말이 필요 없는 악몽 그 자체였지만 한국에게는 세계 랭킹 1위를 꺾었다는 영광을, 멕시코에게는 16강 진출이라는 쾌거를, 독일에게 당한 숱한 패배의 쓰라림을 잊지 못하는 영국과 브라질 등 축구 강국에게는 10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통쾌함을 선물했다.


 한국의 영원한 맞수 일본 입장은 애매했다. 아시아가 독일을 꺾었다는 사실에 흥분할 수 없는 것은 한국의 축구가 세계만방에 찬사 받는 것을 환영할 수만은 없기 때문일 것이다. 반면에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16강에 진출한 일본이 부러운 한국은, 폴란드전 후반 비겁한 플레이로 일관한 일본을 비난하며 FIFA 랭킹 3위의 벨기에에게 져서 탈락할 거라며 애써 위안을 삼았다.


 어제 새벽의 일이다. 보통 때처럼 화장실 욕구 때문에 한밤중에 깬 나는 월드컵이 궁금해서 전화기를 찾았다. 아니, 이게 무슨 일야, 일본이 벨기에를 2대 0으로 이기고 있다니. 잠이 달아났고 TV를 켰다. 결과적으로 벨기에의 역전으로 끝났을 때 중계진이 소리쳤다.

 “고맙습니다. 벨기에가 일본을 극적으로 무너뜨렸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그러나 솔직히 말하자면 일본의 플레이는 충분히 훌륭했고 일본이 기록한 두 골도 오래 기억될 만큼 멋있었다.

 종료 휘슬이 울리자 파란색 유니폼의 일본 선수들은 지치고 참담한 표정으로 그라운드에 벌렁 누워버렸고, 얼굴에 일장기와 욱일승천기를 페인팅한 채 열렬히 응원하던 일본인들은 절망하고 낙담한 표정으로 망연자실할 때, 벨기에 선수들과 응원단은 동료와 주위 사람을 포옹하며 승리의 환희를 만끽했고 한국의 중계진은 마치 자신이 이긴 듯 기뻐했다.


 그대의 불행은 나의 행복이고 나의 슬픔은 그대의 기쁨이라는 사실은 그 순간만큼은 진리였다. 인정하기에는 너무 쪽팔리지만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픈 것은 장삼이사라면 누구나 겪는 인지상정이다. 사람도 그럴진대 국가 간에는 더하다.


 최근의 사례가 있다. 평창 동계 올림픽을 계기로 남북 간에 화해 분위기가 급물살을 타고 남북정상회담과 북미 정상회담이 성공적으로 열렸을 때 일본 입장은 참담했다. 부정적인 여론이 60%를 훨씬 상회했고 긍정적인 반응은 30%에도 미치지 못했다. 작년 북한이 핵실험을 하고 미사일을 쏘아 올렸을 때 일본은 신난다는 듯 연일 강경발언을 쏟아내며 물고기가 물을 만난 듯 군사력 강화에 박차를 가하는 기회로 삼았다.


 역사에서는 더 심하다. 한반도가 남북으로 갈라질 게 아니라 독일처럼 전범국인 일본이 분단국이 되어야 했다.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날 게 아니라 일본에서 전쟁이 일어나서 한국이 그 덕에 경제대국이 되어야 했다. 그래야 정의로운 일이고 그것이 공평한 것 아닌가. 36년이나 온갖 수탈을 당한 것도 모자란 것일까, 수백만의 젊은이들과 아녀자들이 죽어가는 이웃나라의 재앙이, 일본에게는 패전의 폐허에서 경제를 일으키는 절호의 기회가 되었다. 피해 당사자에게는 2중, 3중으로 너무나도 가혹했다.


 어떤 여인이 법륜에게 물었다. 오래 사귀던 남자가 다른 여자와 결혼해서 행복하게 살고 있어서 생기는 불편한 마음을 어떻게 극복하면 되는지 가르쳐달라는 것이 질문의 요지였다. 이미 결혼한 유부녀인 그녀는 전 남친의 결혼생활이 불행하기를 바랐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이 10리도 못 가서 발병 나기를 염원하는 전래민요 가사도 있으니 놀부 여편네 같은 그녀의 심보를 탓할 수만은 없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 없는 사람이 먼저 저 여자를 돌로 치라는 2천 년 전 예수의 가르침은 현재도 진행형이다.


 이유가 무엇이건 이민을 떠났던 사람들이고 이민 갔다가 조국으로 돌아온 사람들이다. 일부 속 좁은 한국인들에게 불편한 것은 당연하다. 수십 년 동안 외국에서 살면서 보험료도 안 내다가 나이가 들어 돌아와서는 자신들과 똑같은 의료보험 혜택을 보는 까만 머리의 외국인들이 불편한 것은, 그대의 행복이 나의 불행이기 때문이다.


 경험하지 못해서 자신들은 모르는 미국이나 캐나다에서의 삶을 대단한 것처럼 떠벌리는 것이 듣기 싫은 것이나, 미국에 살면서 한국의 나쁜 점을 들먹이고 한국에 돌아와서 미국을 험담하는 것도 흡사한 논리다. 나를 버린 님이, 내가 떠난 님이 십리도 못 가서 발에 병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그대의 불행이 나의 행복이기 때문이다.


 이제야 알겠다. 사람들이 자랑하는 글에 불편해하는 이유를, 왜 사람들이 남의 불행에 더 관심을 갖는지를.


 법륜이 답한다. 자신에게 그런 마음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라고, 그런 자신의 마음을 조용히 들여다보라고,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내가 또 못된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라고, 그래도 없어지지 않으면 3천 배를 해서 그런 마음을 들게 하는 자신을 스스로 벌하라고.


 <후기>

 태풍이 지난 다음날인 오늘 아침의 날씨는 10점이 만점이라도 10점 이상을 주고 싶습니다. 적당한 바람에 청명한 날씨는 상쾌하다 못해 향기로운 느낌까지 줍니다. 태풍이 몰고 온 비바람이 없었다면 이런 날씨도 없었을 겁니다.


 현재 삶이 힘겨운 분이 있다면, 이처럼 좋은 날이 반드시 뒤따라 올 것이라는 믿음으로 어려움을 이겨내시기 바랍니다.

 오늘 아침 창문을 통해 바라본 하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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