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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추조 Jul 09. 2018

우리 집, 우리 엄마

꼰대가 안 되려면

 단수와 복수에 민감해진 것은 중학교에 들어가 영어를 배우면서부터다. 아무 명사나 ‘~들’만 붙이면 되니 복수라고 달라질 것이 없는 우리말에는 단수와 복수의 개념이 희미한데 반해 영어는 달랐다. 단어에 따라 ‘~s’나 ‘~es’를 붙이는 정도가 아니라 스펠링 자체가 완전히 바뀌는 것도 있고, 뒤에 따라오는 동사의 변형까지 요구했다.


 그게 뭐 그리도 중요했을까. 중학교 심지어는 고등학교에서도 단골로 시험에 출제되는 것에 단수와 복수에 관한 문제들이 있었다. 머릿속에서 문장을 완성해서 구사해야 하는 나 같은 사람이, 단·복수에 대한 개념 자체가 애초 없으면서도 학창 시절 치렀던 시험 때문에 쓸데없이 단수와 복수를 속으로 따지다가 정작 중요한 대화의 흐름을 놓쳤던 것은 나만의 경험이 아닐 것이다.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사람이 말하는데 ‘person’이면 어떻고 ‘persons’면 어떤가, ‘people is’면 어떻고 ‘peoples are’면 또 어떤가? 언어를 학습하는 목적은 다른 언어 사이의 소통에 있다면, ‘person’과 ‘people’을 따지다가 대화 자체가 불가능해지는 것은 크게 잘못된 것이다. 지금도 그런 식으로 영어를 교육하는지 몰라도 우리는 영어를 너무나 잘못 배웠다. 물론 인정한다, 자신의 무능을 조상 탓으로 돌리는 건 어리석은 자의 변명이라는 것을.


 우리 엄마라고 불렀지 내 엄마라고 한 기억은 없다. 우리 집에서 놀자고 했지 내 집에 가자고 한 기억은 없다. 나만의 엄마가 아니었고, 나 혼자 사는 집이 아니었으니 이상할 것도 없다. 어린 시절 친구들 중에 외아들은 있었어도 누이까지 없는 친구는 없었으며 내게도 동생이 둘이나 있었다. 엄마는 또한 동생들의 엄마였으며, 집도 동생들과 함께 사는 집이었다.


 네댓 명의 아이가 보통이었던 부모의 시대를 이은 우리 세대는 달랐다. 두 아이를 둔 친구도 많았지만 딸이든 아들이든 한 아이만 있는 친구들도 종종 있었다. 주위에서 세 아이를 둔 인간은 나 말고 없었다. 물론 쌍둥이가 아니었다면 나도 둘로 끝냈을 거다. 아니, 예비군 훈련 때 묶었는데 그 사이에 생기는 바람에 아들을 얻었다는 게 더 정확하다.


 이웃을 불러 같이 한잔하려고 인터넷으로 족발과 보쌈을 주문했다. 안주가 도착하는 날 이웃을 부를 것이다. K형, 괜찮은 안주가 있으니 우리 집에서 한잔합시다. 어, 우리 집? 아파트에 혼자 사는 내가 우리 집? 굳이 문법을 따지자면 틀린 말이다. 중학교 시험문제이었다면 따질 것도 없이 오답이다. 그렇다고 ‘내 집’은 더 이상하다. 문법으로는 맞지만 어법으로는 어색하기 짝이 없다. 자칭 글쟁이로 맞춤법과 띄어쓰기 등 문법에 신경을 쓰는 탓에 문득 의문이 들었다.


 영어로는 문제없다. ‘our home’보다는 ‘my home’이 자연스럽다. ‘my sweet home’은 들어봤어도 ‘our sweet home’은 기억에 별로 없다. 사소한 문제로 볼 수도 있으나, 이것은 농경생활을 위주로 공동체 생활이 체질화된 동양적 사고와, 유목민으로서 자기중심으로 생활한 서양문화의 차이일 것이다. 양이나 소 같은 가축은 한 마리, 두 마리, 수가 중요하지만 곡식은 숫자보다는 혈연 중심의 공동체에 골고루 나누는 것이 생존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소중한 가치였을 거라고 짐작한다.


 그렇지 않다면 단·복수 개념이 희미한 우리말과 달리, 동사의 형태까지 바꿔야 할 정도로 복수에 대한 개념이 철저한 영어를 설명할 방법이 없다. 말 같지 않은 소리를 한다고 탓할 독자도 있겠으나 이 엉터리 논리를 좀 더 전개하겠다.


 스무 살 전후에 결혼해서 여러 명의 아이들을 가졌던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우리 세대는 서른 살 전후에 짝을 만나 하나 혹은 둘을 가졌으나, 우리로부터 물려받은 한국의 요즘 세대는 더 늦은 나이에 가정을 이루어 자녀를 안 갖거나 하나뿐이다. 심지어 결혼조차 포기한 이들도 많다.


 여기서 드는 쓸데없는 의문은, 하나밖에 없는 요즘 아이들은 엄마를 호칭할 때 단수를 쓸까, 우리처럼 복수를 사용할까?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나는 잘 모르겠지만, 영어에서는 ‘Our’가 아닌, ‘My Mom told me ~~’라고 할 것 같다. 즉, 단수의 사용은 자기중심적 사고이고, 복수의 개념이 희미한 우리말에서 복수의 사용은 ‘내’가 아닌 타인(형제나 자매)을 의식한다는 의미다.(중국어나 일본어는 어떨까? 잘 아시는 분들의 조언을 부탁합니다.)


 숫자에 민감한 서양은 일찍부터 수학을 발전시켰고, 수학을 바탕으로 과학이 발달하여 세계를 지배하는 결과를 가져왔는데, 자기중심적 이기적 사고가 동력이 되었음이 분명하다. 사회를 발전시키는데 경쟁만큼 효과적인 방법이 없고, 경쟁은 이기적이라는 추진력이 있어야 가능하다. 국가 간 이기적 행태의 절정기는 15세기부터 진행된 유럽의 제국주의 시대이었으며, 1, 2차로 나누어 벌어진 세계전쟁이 그 종말로 수천만 인명이 희생되었던 비극이었다.


 국가와 마찬가지로 사회나 개인도 이기심이 유발한 경쟁의 종말이 존재한다. 이기적 사회의 궁극적 모습은 극단적인 양극화고, 개인의 모습은 결혼하지 않거나 결혼을 하더라도 아이를 갖지 않는 형태로 나타난다. 돈이 경쟁인 자본주의 사회에서 배우자 없이 혼자 마음대로 생활하거나, 수입은 두 배이고 쓸 곳이 없는 조건(DINK: Double Income No Kid)이라면 최상의 경쟁력이다.


 100% 승리를 보장하는 싸움은 이길 만한 약한 상대를 고르는 것이다. 대학생이 시비의 대상으로 초등생이나 유치원생을 선택하면 이기는데 의문의 여지가 없다. 랜드로드가 테넌트를, 대기업이 중소기업을, 고용주가 종업원을, 도지사가 여비서를, 갑이 을을 제멋대로 하게 두는 것은 양극화로 가는 지름길이다. 한국사회가 지금처럼 발전하게 된 원인이 이기심에 바탕을 둔 경쟁력이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1958년 무술년 한 해 동안 100만 명 가까운 아기들이 태어나는 바람에 60년대 초등학교는 2부제, 3부제 수업을 했고 백 명도 넘는 콩나물시루 교실도 흔했다. 작년에 대한민국에서 태어난 신생아는 최초로 30만 명대이었으며, 이 추세라면 7~8년 후에는 20만 명대로 추락한다는 뉴스를 보았다. 이대로 간다면 시간이 문제일 뿐, 10만 명 이하가 되는 날도 있을 것이고 지구 상에서 한민족이 멸종되는 날도 올 것만 같다.


 다른 사람은 죽든 말든 나만 잘 살겠다는 이기심, 다른 아이는 어떻게 되든 내 아이만 경쟁에서 이기면 된다는 이기심, 테넌트는 망하든 말든 돈 더 준다는 사람에게 렌트를 주겠다는 이기심, 하청업체를 최대한 쥐어짜서 이익을 극대화하겠다는 이기심의 종말이 어떻게 될지는 뻔하다. 이기심이 어느 정도까지는 발전에 도움이 되는 것은 분명하지만, 적당한 선에서 함께 사는 길을 찾아야지 그렇지 않다면 공멸하고 만다는 것은 역사가 증명한다.


 너를 죽이면 나도 죽는 게 사회적 동물인 인간으로서 피할 수 없는 공동체의 원리다.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 사주와 가족들의 어처구니없는 행태를 보면 지금까지 갑이 을을 어떻게 취급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다. 공멸하지 않으려면 충분히 부를 축적한 지금은 테넌트와 종업원, 을과 타협해서 이기심을 줄이고 이타적인 협력을 늘려가는 방법이 유일한 공생의 길이다.


 이미 충분한 경험을 축적한 유럽에서 답을 찾을 수 있다. 그것은 복지다. 랜드로드에게, 대기업에게, 고용주에게, 갑에게 더 많이 거둬서 대학생이 학비 걱정 없이 마음껏 공부하고, 정부에서 신생아들을 보살피고, 대학생이 싸움의 상대로 아이를 선택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힘없는 종업원이라도 일주일에 52시간 이내로 일하도록 강제해서 일터보다는 가정에 충실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최선의 방법은 아닐지언정 공멸의 길이 아닌 것만은 분명하니까.


 <후기>

 이런 글을 안 쓰려고 하는데도 또 주제넘는 글이 돼버렸습니다. 우리 집이 맞을까, 내 집이 맞을까 라는 것으로 시작한 글이었는데 생각이 자꾸 비약하는 바람에 그렇게 되었네요. 원래 의도는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수필이었습니다.


 딸도 딸이지만 밑에 아들 녀석도 지난 토요일로 서른두 살이 되었습니다. 딸에게 아빠 대신 축하도 해주고 맛있는 것도 사주라고 했지요. 그리고 카톡으로 아들과 대화했습니다.

 “오늘 재밌게 잘 보냈니? 벌써 서른두 살이구나, 얼른 장가가야겠다.”

 “네, 맛있는 거 잘 먹고 집안일도 하고 날도 괜찮았어요! 감사합니다.”

 간단하죠?


 제가 그 나이 때는 세 아이의 아빠로, 회사의 초급간부로 정신없이 보냈었는데 말입니다. 물론 이런 말을 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는 것을 잘 압니다. 말이 입 밖으로 나오는 순간 꼰대로 전락하니까요.


 오늘 뉴스에서 가족 간의 호칭도 바꿔야 한다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여성의 입장에서 미혼인 시동생이나 시누이를 '도련님'과 '아가씨' 같은 극존칭으로 불러야 하는 불합리에 대한 반격이었습니다. 장모나 장인이라는 호칭은 반대로 비하라는 주장입니다. 아내의 부모도 차별 없이 어머니, 아버지로 부르는 것이 맞는 호칭이랍니다.(기사 보기)


 모든 것이 급변하는 세상입니다.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맞추는 것이야말로 새로운 세상에서의 올바른 처신입니다. 우리가 살았던 시대를 고집하며 과거를 언급하는 것은 꼰대가 되는 지름길일 뿐입니다,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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