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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추조 Jul 30. 2018

한여름의 단상

여름의 권태

 일본에 상륙했다는 태풍의 영향인가, 파란 하늘 점점이 보이는 조각구름이 제법 빠른 속도로 서쪽으로 흘러간다. 그 밑으로 고추잠자리가 떼를 지어 날고 멀리서 매미 소리가 새소리에 섞여 들려온다. 7월 말의 늦은 아침은 권태로운 기운이 가득하다. 열어젖힌 창으로 넘어오는 바람이 더위를 잠시 잊게 하고, 실려오는 풍경이 평화롭다 못해 권태롭다.


 - 싸리문 옆에 누워있는 삽살개가 낯선 사람을 보고도 짖지 않을뿐더러 쳐다보지도 않는다. 도둑질하러 마을에 들어온 도둑이 도심을 도둑맞은 듯 지나간다.

 이상의 ‘권태’라는 수필에서 보았던 글귀가 떠오른다. 오래전에 읽었던 것이라 정확하지 않겠지만, 짖지 않는 개와 도심을 잃어버린 도둑으로 표현한 권태로움을 이보다 잘 나타낼 수가 없다.


 연중 제일 덥다는 7말 8초로 이어지는 주일이 시작하는 월요일이다. 많은 사람이 가장 빈번한 휴가철을 맞아 도시를 떠나 제주나 여수 또는 비슷한 곳을 찾을 것이다. 이럴 때는 꼼짝 않고 지내는 게 최선이다. 갑자기 사람들에 대한 측은지심이 일어난다. 막히는 고속도로에, 뜨거운 햇볕 아래 붐비는 해변에, 바가지요금에 시달릴 것이다. 그런데도 떠나게 만드는 힘은 무얼까. 남들이 그렇게 하니까, 아니면 그렇게라도 추억을 만들어 소중하게 간직하려는 것일까.


 아마도 전자보다는 후자일 것이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 아이들에게 좋은 추억을 만들어주고자 꽤 돌아다녔다. 무주구천동 계곡의 텐트 속에서 비를 맞으며 캠핑했고, 대전 엑스포에서는 뜨거운 여름날 몇 시간씩 줄에서 기다렸고, 투덜거리는 아이들을 데리고 설악산, 속리산과 계룡산을 오르기도 했다. 미국에서도 플로리다 올랜도, 버지니아 윌리엄스버그, 캐나다 몬트리올과 오타와, 뉴햄프셔 워싱턴 마운틴을 갔었다. 그 추억들을 간직하는 것은 아이들 몫이다.


 이제는 도서관에서 책을 읽으면서 무더위가 지나가기만 조용히 기다릴 뿐이다. 오늘은 아침의 시원한 바람이 도서관으로 향하는 마음을 붙잡았다. 쉬지 않고 열흘을 출근했으니 하루 쉴 만하다. 글도 끄적거리고 음악을 크게 틀어놓고 듣는 자유를 누리고 싶다. 오후에 비가 온다는 일기예보도 한몫 거들었다. 휴가철을 만나 부산하게 움직이는 사람들을 도외시하고 한여름의 권태를 즐기는 것도 그럴듯하다.


 폐결핵으로 죽어가는 몸을 요양하러 갔던 평남 성천에서 이상이 느꼈던 권태와는 분명 다르다. 그렇더라도 1910년에 태어나 왜놈들에 의해 불량 선인으로 찍히는 바람에 감옥에 갇혔던 후유증으로 1937년 스물일곱 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요절한 천재 이상(본명: 김해경)의 마음을 좇는 것이야 어떻겠는가. 권태와는 다르게 격동하는 한국은 날마다 놀라운 뉴스와 흥미진진한 뉴스거리를 하루가 멀다고 쏟아낸다.


 국회의원 노회찬 씨가 자살했다는 놀라운 뉴스를 접한 지가 오늘로 딱 일주일이다. 가장 좋아하고 존경하는 정치인이었다. 평생을 남보다 덜 가진 약자를 위해 헌신했기 때문이다. 그와 동시대 사람으로서 고등학생 때 유신을 반대했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잘 알기 때문이다. 게다가 적당히 시류만 타면 출세가 보장된 경기고등학교 학생이었다. 어떻게 하면 그런 용기를 낼 수 있을까. 죽었다 다시 태어난다 하더라도 내게는 불가능한 일이다.


 불법과 탈법을 공공연하게 저지르는 대한항공의 조양호 일가족도 있는데, 세습을 위해서 국민의 노후를 위한 국민연금에 수천억 손해를 끼친 삼성의 이재용도 있는데, 판공비로 쓰라고 지급된 수천만 원을 생활비로 쓰거나 장부를 조작해서 만든 검은돈을 정치자금으로 사용한 양심 불량 국회의원도 많은데 말이다. 작은 흠집에도 못 견디고 번뇌와 후회의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냈을 그의 정갈함에 고개가 숙어지고 부끄러움이 밀려온다. 그러고 보니 TV에서 돈을 받은 적이 없다며 말할 때 얼굴에 나타났던 어색함의 이유를 이제야 이해하겠다.


 안희정 전 충남지사와 그의 수행비서였던 김지은 씨의 성폭행 사건이 지난주에 모든 심리를 끝내고 마지막 판결을 앞두고 있다. 갑남을녀에게 성인남녀의 내밀한 사연보다 흥미로운 가십은 없다. 강 건너 불구경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다. 잘못을 인정하면서도 강제적인 추행은 아니었다는 피고인과 위력에 의한 폭력에 저항할 수 없었다는 고소인의 주장 가운데 누가 맞을까. 둘 중의 하나는 거짓임이 분명하다. 관전자의 관점에서 안희정의 손을 들어주고 싶은 이유가 있다.


 친구에게 들은 이야기 때문이다. 아무리 아내를 사랑하고 있더라도 대드는 이성에게 마음과는 달리 몸이 반응하더라는 것인데, 같은 수컷으로 충분히 이해 가는 말이다. ‘원나잇 스탠드’를 마음에 한 번이라도 품어보지 않는 수컷이 있다면 성인군자가 분명하다. 다음은 경험이다. 이런 문제에서 남자는 여자를 결코 이길 수 없다는 걸, 예순 살이 넘어서야 비로소 깨달았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스무 살이나 어린 여성, 그것도 수행비서를 건드린 안희정의 도덕성에 문제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 단지, 그가 살아온 인생 여정을 생각할 때 안타까움이 든다.


 이재명 경기지사의 조폭연루설이 점입가경이다. 지난 7월 21일 SBS의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는 태국 파타야에서 발생한 한국 젊은이의 살인사건으로 시작해서, 성남시 조직폭력배 ‘국제 마피아’ 단과 연루된 이재명 씨로 끝맺었다. 이 지사는 조폭인지 모르고 변호했다고 강변했고, SBS는 전후 사정을 고려할 때 모를 수가 없다고 주장했다. 이 지사의 지난 시절을 돌아보면 그가 맞을 것 같지만, 방송을 보면 그가 거짓말을 하는 것 같다. 누가 맞을까.


 이 두 사건이 관심을 끄는 것은 두 사람이 지난 대선에서 문재인 대통령과 경선했던 사람이기 때문이다. 고양시 시장 최성이라는 또 한 사람이 있긴 했으나, 0.4%에 불과한 득표율이나 낮은 인지도로, 20% 내외를 득표한 안희정이나 이재명에게 비할 바가 아니기에 무시한다면 차기 대선후보로 가장 유력했던 사람들이다. 영화나 소설을 너무 많이 본 탓인지는 몰라도 배후에 무언가 있지 않겠냐는 생각마저 든다.


 권태로움이 가득한 바깥 풍경이 전혀 권태롭지 않은 것은 이곳이 한국인 탓이 크다. 그렇더라도 오늘 하루는 권태를 즐겨야겠다. 필요한 것은 음악과 선풍기뿐이다. 흘러가는 구름과 파랑과 하양과 초록을 배경으로 떠도는 고추잠자리들이나 보면서 이상의 권태를 따라간다.


- 2018년 7월 30일 오전 여수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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