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le Carnegie’가 1932년에 저술한 ‘Lincoln the Unknown’을 번역한 ‘링컨, 당신을 존경합니다!’라는 책의 내용이 이 글의 배경입니다. 따라서 인용한 글도 거기서 가져왔으면 괄호 안의 숫자는 책의 페이지를 의미합니다. 링컨에 대한 글을 읽고 받은 단순한 감동을 옮긴 글입니다.)
미국의 문학가이자 저술가인 데일 카네기가 영국에 있는 동안 우연히 신문의 칼럼을 읽었는데, 미국 역사에 상당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링컨에 대해서도 잘 안다고 생각했던 저자가, 처음 접하는 내용들을 영국 신문에서 보고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미국으로 돌아온 후, 동료들이나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봐도 자신이 알고 있는 이상으로 아는 사람이 없어서, 링컨에 대한 책을 쓰기로 하고 자료를 수집하고 연구해서 쓴 책이다.
이처럼 미국인도 알지 못하는 링컨을 한국인이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민족의 영웅인 충무공이나 세종대왕의 생애도 마찬가지다. 위인들의 업적에만 초점을 맞추다 보니 그분들 인생의 인간적인 면이나 고뇌는 감춰지고 잊히기 일쑤다. 조선의 혼군(昏君) 선조에게 고초를 당한 충무공이 매질의 후유증으로 얼마나 고통 속에서 나날을 보내야 했는지에 대해서는 감각이 둔하다.
깡촌의 통나무집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정규 교육을 받지 못한 채, 몇 마일을 걸어서 책을 빌려 독학으로 변호사가 된 후 정치에 뛰어들었고, 마침내 16대 대통령이 되어 노예를 해방시켰다는 게 일반적으로 알려진 사실이다.
첫사랑이었던 여성을 전염병으로 잃고 폐인이 되다시피 방황했고, 사업에 실패해서 빚쟁이로 전락했으며, 마지못해 결혼한 가정은 지옥과 같아서 평생 우울증에 시달렸고, 선거에는 매번 떨어져서 네 번의 낙선 후에 연방하원의원에 처음 당선되었으며 다시 세 번의 낙선 끝에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데일은 링컨의 ‘그 깊이도 알 수 없는 슬픔’의 원인으로, 극복할 수 없는 정치적 실망과 비극적인 결혼생활이라고 전했다.
죽음의 그림자도 평생 링컨을 따라다녔다. 여덟 살에 생모를 잃고, 가장 의지했던 누이도 10대에 죽었으며 애틋했던 첫사랑까지 떠나보냈고, 백악관에서는 전염병으로 사랑하는 아들 윌리까지 잃었다. 쓰기는커녕 읽지도 못하며 항상 링컨의 게으름을 나무랐던 부친 토마스 링컨과는 죽을 때까지도 사이가 좋지 못했다. 링컨만큼 불행한 인생이 또 있을까 싶을 정도다.
정적들은 생김새 갖고도 링컨을 공격했다. 요철이 심한 얼굴을 고릴라에 비유하며 조롱하는 글이 신문에 실렸다. 그걸 읽고 안타까운 생각이 든 여자아이가 링컨에게 편지를 써서 턱수염을 기르라고 충고했다. 링컨의 트레이드마크이자 상징인 턱수염은 그렇게 생겼다. 링컨이 하는 모든 연설과 행동은 정적과 언론에게는 조롱의 대상이었던 반면에 대중들은 그에게 환호했다.
만약 첫사랑이 앤이 죽지 않고 링컨과 결혼해서 행복한 인생을 살았으면 어땠을까? 앤이 죽은 것은 링컨에게는 더할 수 없는 불운이었으나 미국에게는 더할 수 없는 행운이었다는 것이 저자의 견해다.(P107) 앤이 살아있었으면 링컨은 대통령이 되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녀가 원하는 대로 순회 판사를 따라다니는 변호사로 살아가는 링컨은 행복했겠지만, 미국은 불행해졌을지 알 수 없다. 개인의 불행이 미국과 인류에게는 복음이 된 셈이다.
턱수염과 함께 링컨의 다른 트레이드마크는 정직이다. 오죽하면 별명이 ‘어니스트 에이브’였다. 지금이나 그때나 정치인들이 정직하지 않은 것은 마찬가지다. 사업 실패로 지게 된 거액의 빚을, 일리노이 스프링필드를 떠나지 않고 17년 동안 걸려 다 갚았다. 당시에는 일리노이 주(州)를 벗어나면 빚을 탕감받는 법이 있어서 모두들 그렇게 했었다.
링컨은 정직했고, 매사 진정성을 갖고 열성을 다했으며, 유머를 잃지 않았다. 하원의원 시절 의사당에서 정적에게 공격을 당했다.
- 당신은 이랬다저랬다 하는 두 얼굴을 가진 사람입니다.
- 친애하는 의원님, 제가 두 얼굴을 가졌다면 잘생긴 얼굴을 갖고 이 자리에 나오지 고릴라를 닮은 얼굴을 달고 나왔겠습니까?
전쟁도 초기에는 연전연패였다. 수적 우위에도 불구하고 북군의 장군들은 무능했을 뿐 아니라 링컨의 명령에 저항할 만큼 불화가 심했으며 남군의 리 장군은 뛰어난 지휘관이었다. 심지어 링컨의 절친한 친구조차도 1864년 6월의 일기에, ‘지금 이 나라에 필요한 것은 유능한 행정수반을 선출하는 것이다.’라고 적었다.(P193) 영국의 은행들은 북군의 패배를 기정사실로 취급했다.
북부에서도 남부에서만큼이나 거친 비난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링컨을 강탈자, 매국노, 폭군, 악마, 괴물이라고 불렀으며, ‘칼을 들고 싸우라고 소리치며 더 많은 희생을 호소하는 잔악무도한 도살자’라고 비난했다.(P192) 공공연히 그는 죽어 마땅하다고 말하는 사람까지 생겨났고 심지어 어느 여름 저녁 링컨이 사령부에서 말을 타고 나오는 순간 암살하려는 시도까지 있었다.
- 이 전쟁이 나를 죽이고 있습니다.
링컨은 이렇게 말하며 평화를 볼 때까지 살 수 없을 거라고, 스토우 부인(‘톰 아저씨의 오두막’ 저자)에게 보내는 편지에 적었다. 피골이 상접해진 링컨의 모습에 놀란 친구들이 휴가를 권했지만 받아들이지 않았다. 모든 일에 관대하고 동정심이 많았던 링컨의 귀에는 과부와 고아가 된 이들의 아우성이 떠나지 않았다.(P195) 심지어 사형을 목전에 둔 탈영병을 사면해주라는 편지를 장군들에게 보냈고, 장군들은 대통령이 지나치게 관대해서 군대의 규율이 엉망이 된다며 짜증을 냈다. 링컨은 지원병이나 농촌 출신의 병사들을 유난히 좋아했다.
- 내가 전쟁터에 있었더라도 총을 버리고 달아나지 않을 거라고 자신할 수 없다.
- 나는 반드시 승리하려고 하지 않지만 진실하려고 노력합니다. 나는 반드시 성공을 거두려고 하지 않지만 내가 옳다고 여기는 방식으로 살아가려고 노력합니다.
링컨은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말했다.
- 자신이 심판받지 않으려면 다른 사람을 심판하지 마시오. 그들은 단지 우리가 처했을지도 모를 그런 처지에 있을 뿐입니다.
북군은 펜실베이니아의 작은 마을 게티즈버그에서 판단미스를 범한 리 장군에게 대패를 안기면서 전쟁은 급격하게 북군에게 기운다. 7월 첫 주 내내 계속된 전투의 결과는 3만2천이 넘는 사상자만큼이나 참혹했다. 사체를 제대로 처리할 수 없었던 북군은 한곳에 임시로 매장하고 가을에 묘지위원회를 발족하여 정식으로 개장하는 기념식을 개최한다.
위원회는 당대 최고의 연설가 ‘에드워드 에버렛’을 초청했다. 의례적으로 초대장을 보냈을 뿐, 링컨의 참석을 예상하지 못한 묘지 위원회는 에버렛의 연설이 끝난 후 ‘분위기에 맞는 적절한 말’을 조금만 해달라고 부탁했다. 에버렛은 한 시간 늦게 도착했으며 그의 연설은 두 시간이나 계속되었던 반면에, 2분 동안 열 문장에 불과했던 링컨의 게티즈버그 연설은 단순한 연설이 아니었다.
그 연설의 마지막은 이렇게 장식한다.
- 하느님의 가호 아래 이 나라는 새로운 자유의 탄생을 보게 될 것이며,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는 이 지상에서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연설을 끝냈을 때 에버트이 연설에 환호했던 군중들 아무도 박수조차 보내지 않았다. 링컨 자신도 대중의 흥미를 끌지 못한 연설에 실망해서 비탄에 빠졌다. 당시 민주당에 우호적이었던 ‘시카고 타임스지’에서는 ‘멍청하고 평범한 일용잡부들이나 할 만한 연설’이라고 폄하한 반면에, 공화당에 우호적이었던 ‘뉴욕 타임스지’에서는 칭찬 일색이었다.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것은, 미국이나 한국이나, 15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별 차이가 없다.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