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국지(列國誌)’라는 책을 읽었다. BC770에서 BC221년 사이의 550년 동안의 춘추전국시대에 벌어진 역사적 사실을 배경으로 쓴 연의 소설이다. 동양에서는 인도의 석가모니를 필두로 공자와 맹자 같은 제자백가 사상가들이 나타나 불교와 동양철학이 잉태되었고, 유럽에서는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사상을 기초로 서양철학이 움튼 것도 동시대이었다.
당시에는 이들 두 문명이 왕래했을 리가 없었을 텐데도, 비슷한 시기에 인간 존재에 대한 학문이 시작했다는 역사적이며 우연한 일치에 통쾌함을 느꼈다. 열국지는 중국의 사대기서에는 포함되지 않지만, 인류학적으로는 혼란한 시기에 각종 사상이 피어난 중요한 시대가 아닌가 생각한다. 시간적 흐름으로 볼 때 열국지 다음은, 초한지, 삼국지, 수호지 순이다.
춘추전국시대의 종말을 고한 것은 중국을 통일한 진(秦) 나라의 시황제이고, 진시황 사망 이후 혼란한 시기에 초나라의 항우와 한나라의 유방이 천하의 패권을 놓고 다툰 것이 초한지이며, 해하(垓下)의 일전에서 크게 이기고 항우를 죽인 유방이 건국한 한나라가 400여 년이나 이어지다가 조조, 유비, 손권이 패권 다툼을 벌인 것이 삼국지의 배경이다. 수호지(원제는 수호전)는 훨씬 이후의 송대(宋代)를 배경으로 하나 역사적 사실보다는 허구가 심하다는 게 학계의 정설이다.
옛날 일간스포츠 신문에 연재되었던 고우영 씨의 만화부터 소설가 이문열 씨의 작품까지 삼국지는 열 번을 다시 읽어도 재미있는 소설임이 분명하지만, 초한지나 수호지도 한 번은 읽을 만한 재미와 가치가 충분하다. 그에 비하자면 열국지는 4천 페이지가 넘는 방대한 분량 말고도 인내심이 필요한 다른 이유가 있는 책이다.
우선 수많은 나라와 너무 많은 인물이 등장해서 여간 헷갈리는 게 아니다. 같은 이름의 나라까지 있어서 자주 등장하는 진나라는 셋(晉, 秦과 陳)이나 된다. 게다가 수백 명이나 등장하는 임금의 명칭도 나라마다 세월만 달리해서 같은 이름이다. 목공, 문공, 소공, 제공 등은 진에도 있고 초에도 있으며 모든 나라에 있다.
그런데도 끝까지 읽을 수 있었던 것은 – 그것도 번역자를 달리 한 두 질을 거의 – 2,500년 전 인간의 욕망이 작금의 세상, 그것과 다를 것이 없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어찌 그리도 닮았을까? 2,500년이라는 시간이 학문과 과학을 발전시켜 어마어마한 문명을 이룩했다고 하더라도, 시기심과 물욕, 권력 암투, 애욕, 의심, 모함과 배반, 유언비어 날조와 가짜 뉴스, 거짓말 등은 오늘날의 인간 세계와 하등 다를 것이 없다는 지적(知的) 오르가슴이 컸다.
이야기를 진행하기 위해서 춘추전국시대의 시대적 배경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당시에는 강태공이라는 명재상에 의해 탄생한 주(周)라는 절대권력 국가와 제후국이 있었다. 제후국이란 공·후·백·자·남이라는 귀족에게 – 왕의 친인척이나 오랑캐와의 전쟁에서 공로가 있는 공신 등에 주어지는 작위 – 주어진 봉토로서 제후들이 다스리는 봉건국가이며, 그들은 왕으로 칭할 수 없었고 후(侯)나 임금으로 불렸다. 여러 제후국 군주의 성씨가 주나라 왕의 성씨와 같은 희씨였으며, 제나라는 강태공에게 주어진 봉토로 그의 후손이 임금이었다.
봉토를 하사 받은 제후국은 왕이 다스리는 주나라에 조공을 바치는 것으로 군신의 관계를 유지했다. 제때 조공을 바치지 않는 제후국이 있으면 주나라에서 군사를 일으켜 징벌한 후 항복과 충성 명세를 받거나 제후를 교체하는 방법으로 질서를 유지했다. 이런 군신 관계는 주나라가 강할 때 유지되었으며 백성들은 소위 태평성대를 누릴 수 있었다.
향락에만 몰두하는 혼군(昏君)이 나타나면 옳고 그름을 구분할 줄 모르고 간신들의 감언이설로 정사를 그르쳐 민심이 돌아서면서 국력은 쇠퇴해 갔다. 약해진 국력으로 서쪽 오랑캐의 침략을 당해내지 못한 주나라가 동쪽으로 천도하면서 춘추전국시대가 열린다.
충신을 멀리하고 간신을 중용한 주나라 왕은 제후국들을 다스림에서도 공정하지 못하여 제후국들이 이탈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부당한 대우를 받는 제후국들은 힘을 길러 주나라에 대항했고, 약한 제후국들은 아무런 역할도 못 하는 주나라를 의지하는 대신에 강한 제후국에 조공을 바치며 보호받았다. 허약한 주나라와 강한 제후국은 곧 ‘춘추 5패’가 등장하는 배경이 된다.
현군(賢君)이 되어 강력한 군사력으로 주나라의 위엄을 대신 세워주며 정의로움과 공정 무사함으로 제후국 간에 질서를 유지하는 역할을 한 다섯 명의 제후들이다. 재미 삼아 춘추전국시대의 상황을 오늘날의 세상에 억지로 비유해 보았다. 이름뿐이기는 하나 천하가 인정하던 주나라를 오늘의 유엔에, 춘추시대의 제, 초, 진 등의 강한 제후국을 작금의 미국을 비롯한 강대국에 대입하자 흥미로운 발견이 나타났다.
제후국이 마음에 안 드는 제후국을 침략할 때 주나라 왕의 이름을 빌렸던 것은, 미국이 반미 국가를 응징하고 중동에서 새로운 질서를 만들 때 유엔을 동원하는 것과 유사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지금의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패권(다른 나라를 뜻대로 움직이는 힘)을 가진 나라는 미국이다.
전후 새로운 질서를 만들기 위하여 1945년 2월 얄타에서 열린 미·영·소 정상회담으로, 2차 세계대전 이후 패권은 소련과 미국으로 양분되었다. 3국이 참가했더라도 이미 이빨 빠진 늙은 호랑이 신세에 불과한 영국은 미국에 아무런 도움이 안 되었고, 금방 무너질 줄 알았던 일본이 ‘가미카제’라는 예상치 못한 공격으로 저항하면서 엄청난 인적 물적 피해가 발생하자, 당황한 루스벨트 대통령은 소련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개발 중이었던 원자폭탄이 완성되지 않았다는 것도 불행이었다.
덕분에 스탈린은 패전국 독일과 유럽의 절반 및 북한을 비롯해 국경이 맞닿은 대부분의 국가를 자신의 패권 아래에 둘 수 있었다. 그렇게 양분되었던 패권은 소련의 붕괴로 미국으로 넘어갔고, 그때부터 세계 질서는 패권국인 미국에 의해 입맛대로 재편되었다. 미국 달러는 세계에서 통용되는 기축 화폐가 되었고, 값싼 노동력을 찾아 개발도상국으로 진출하는 미국 기업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1986년 우루과이라운드를 출범시켜 자유무역협정(FTA)을 위한 세계 무역기구를 설립했다.
미국의 패권을 인정하고 미국이 만든 질서 속에 참여하는 나라는 보호를 받았다. 춘추시대의 패권을 가진 제후국도 같았다. 약소 제후국들은 임금이 바뀔 때마다 패권국의 승인을 받았고, 반란이나 반역으로 세자가 아닌 자가 권좌에 오를 때는 많은 뇌물을 바쳐서 승인을 받거나 아니면 주나라의 이름을 빌린 정의의 이름으로 토벌당해야 했다. 주나라 왕은 이름을 빌려주는 대가로 패권국으로부터 가장 많은 조공(뇌물)을 받았다.
193개국이나 되는 가입국을 가진 유엔도 모든 나라에 운영비를 분담시킨다. 2013년 기준 22%나 되는 분담금을 내는 나라는 미국이 유일무이하다. 미국과 함께 G2라는 중국은 8%에도 못 미친다. 유엔이 미국 뜻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는 원인이 여기에 있다. 돈의 힘이 바탕이 된 강자의 갑질은 국가 간에 시작하여, 기업과 개인에게까지 퍼진 악행이었다.
미국의 패권을 나눠 가지려는 중국이 등장했다. 춘추시대 패자(霸者)였던 진(晉) 문공은 패권을 나눠 가지려고 했던 초나라를 원정하여 항복을 받았다. 미국이 패권을 중국에 나누려고 할까? 천만의 말씀이다. 중국의 시진핑은 덩샤오핑의 유언을 지켜야 했다. “도광양회(韜光養晦)를 50년간(백 년이라는 설도 있음) 계속하라!”
미국의 3분의 1에 불과한 조공(유엔 분담금)을 바치면서 미국이 가진 패권을 나눠 가지려고, 일대일로(一帶一路)를 주창한 것은 시진핑의 커다란 오판이 아닐 수 없다. 진 문공이 초나라를 정벌했듯이 패권 독점을 원하는 미국의 두뇌들이 트럼프를 앞세워 중국 응징에 나서는 빌미를 제공했을 뿐이다.
(To be continued~~)
※註: ‘도광양회(韜光養晦)’란 ‘칼을 칼집에 넣어 검광(劍光)이 밖으로 새 나가지 않게 하고 그믐밤 같은 어둠 속에서 실력을 기른다’라는 뜻의 사자성어로 삼국시대에 조조에 대항할 힘이 없는 유비의 전략이었다. 덩샤오핑은 자신의 사후에 최소 50년 동안은 미국에 대항하지 말라는 의미로 유언을 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