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arn from yesterday
“Living in the past is a dull and lonely business; looking back strains the neck muscles, causes you to bump into people not going your way.”
퓰리처상을 받은 미국 여류 소설가 Edna Ferber(1885~1968)가 한 말이다. 틀린 말이 아니니 부정할 생각은 없다. 뒤돌아보는 일이 목 근육에 무리를 주는 것처럼 과거에 집착하는 삶은 어리석을 뿐 아니라 인생을 고독하게 하는 일임이 분명하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라 불리는 Gen. George Washington은 이렇게 말했다.
“We should not look back unless it is to derive useful lessons from past errors, and for the purpose of profiting by dearly bought experience.”
독립전쟁 초기 민간인으로 구성된 오합지졸을 이끌던 워싱턴 장군은 훈련이 잘된 영국군에게 연전연패를 당했다. 패전에서 배운 교훈으로 그는 마침내 영국군을 북미 대륙에서 몰아내고 독립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다.
“Learn from yesterday, live for today, hope for tomorrow. The important thing is not to stop questioning.”
인류 역사상 가장 뛰어난 천재의 하나로 칭송받는 Albert Einstein의 어록이다. 학교든, 사회든, 가정이든 간에, 우리가 습득한 모든 지식은 과거에서 왔다. 아무리 목 근육이 땅기고 아프더라도 뒤를 돌아봐야 하는 이유 또한 분명하다. 과거로부터 배운 지식이 없다면, 오늘도 어제와 마찬가지로 불편한 삶을 감수해야 하고 미래의 발전도 있을 수 없다.
2011년 3월 인터넷에 쓰기 시작한 글이 벌써 8년째다. 처음에는 썰렁한 카페 공간을 채우기 위해서라도 글쓰기에 필사적이었다. 서당 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했던가. 시간이 지나면서 글은 생활이자 인생 2막의 목표가 되었으며, 그동안 1,500개가 넘는 글을 쓰면서 글을 보는 안목까지 생겼다는 교만에 가까운 자부심으로, 어떤 내용이라도 세 줄 이상의 문장만 있으면 글쓴이의 의도가 보였다.
남들이 인정해주든 말든 자칭 글쟁이라는 자부심으로 맞춤법과 띄어쓰기에 주의를 기울인 것도 그래서였다. 유명 작가의 책을 읽으면서 ‘옥에 티’를 찾아내려는 건방도 이때부터 시작했다. 나는 프로(?)니까. 사람은 누구나 제멋에 사는 거니까. 나처럼 건방을 떨기 싫다면 맞춤법 같은 귀찮은 일에 신경 쓸 필요가 없다.
찾아오는 분들로부터 가끔 책을 내라는 분에 넘치는 칭찬도 받지만, 글 쓰는 목적이 자기만족과 그에 따른 즐거움이지 돈벌이가 아닐뿐더러, 이민 경험이 없다면 공감하기 힘든 글이 많아서 출판은 언감생심이고 이런 식에나 맞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어느 분이 소개한 출판사에 연락한 적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책을 내려거든 인터넷에 올린 글을 전부 내리라는 말을 듣기도 했다.
현재의 내가 뒤를 돌아본다면, 그것은 Edna가 지적한 것처럼 과거 속에 머무르기 위함이 아니다. 과거에 집착하기는커녕, 최근 4년 중에서 지난 1년이 내게는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 5년 전에 결혼한 딸이 바라던 대로 건강한 아이를 낳아서 나는 마침내 할아버지가 되었고, 제주를 떠나 여수에 잘 정착해서 편안한 나날을 보내고 있으니 더 바랄 것이 없다. 다음 달에는 보고 싶었던 손녀를 만나러 뉴저지를 방문하며 가는 길에 LA에도 들리려고 티켓팅까지 전부 끝냈다.
뒤돌아보는 것은 워싱턴 장군이 독립전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 했던 것과 비슷한 논리일 뿐이다. 아인슈타인이 간파한 것처럼 질문을 끊임없이 던짐으로써 어제로부터 무언가를 배울 것을 끌어내기 위해서다. 어떤 분이 말한 것처럼 내가 지나치게 솔직하다면, 그래야만 눈곱만 한 가치라도 있는 레슨을 얻을 수 있고, 누군가에게 작은 위로라도 되는 글을 쓸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인터넷에 떠도는 수많은 글이 전혀 도움이 안 된다고 말할 수는 없어도, 어두운 면을 감추고 밝은 면만 드러내고 싶은 인간의 속성상 기·승·전·해피엔딩으로 끝맺는 글이 대부분이다. 주식으로 돈 벌었다고 자랑하는 글을 올리는 사람은 많아도, 손해 보았다고 자학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있다면 자살했다는 뉴스 기사처럼 제삼자가 쓴 글이다. 이민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이만큼 잘살고 있다고 과시하는 글은 많아도, 이민이 얼마나 외롭고 고달픈 여정인지 알리는 글은 찾기 힘들다.
이유는 분명하다. 누가 시켜서 주식에 투자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투자해서 망했기 때문에 알려지는 것이 쪽팔린다. 게다가 주식으로 먹고사는 회사들은 주식으로 돈 벌 수 있다는 희망을 널리 퍼뜨릴수록 이익이 창출된다. 누가 강요해서 이민한 것이 아니기에 힘들게 살고 있다고 밝히는 순간, ‘병신같이 누가 이민 가랬어!’라며 쪼다로 전락하기 쉽다. 게다가 이민자들이 있어야 벌어먹고사는 사람들은, 이민에 대한 환상을 심어주어야 수입원이 되는 손님들이 많아진다.
주식으로 돈을 번 사람이 있다는 것을 부정하자는 것도, 이민으로 행복해진 분들이 많다는 것을 부인하자는 것도 아니다. 글의 요점은 반대의 경우도 무시할 수 없다는 것도 인정하자는 것뿐이다. 실제로 주위에서 경험하고 보았던 이웃들은 힘들고 재미없게 사는 분들도 적지 않았으나, 인터넷상에 떠도는 글들은 반대의 경우가 훨씬 많았다.
체구도 왜소한 53년생 성당 교우는 세탁소를 하다가 찌는 더위 속에서 졸도하여 응급차에 실려 갔었고, 투자 이민을 온 젊은 부부는 원달러 스토어를 하다가 가져온 50만 불을 다 날리고 신분도 해결되지 못한 채 식당에서 접시를 닦으며 살고, 이혼한 딸의 어린 아들을 돌보며 매일 부부싸움을 하던 이웃도 보았고, 삼성 주재원으로 있다가 눌러앉아 에어컨을 고치며 손님들의 말도 안 되는 요청도 묵묵히 들어주던 대학 후배도, 서브프라임 금융위기 때 파산하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고등학교 후배도 있었다.
이민이라는 겉모습은 화려하게 비칠지 몰라도 인생을 ‘Pursuit of Happiness’라는 거울에 객관적으로 투영했을 때, 내 눈에 비친 그들은 자신이 선택한 길이기에 아무 불평도 못 하고 타성에 젖어있을 뿐 행복과는 거리가 있는 모습이었다. 나는 글감을 과거 속에서 자주 찾는다. 타인의 경험이 아닌, 내가 경험한 것, 내가 직접 눈으로 목격한 것들이 소재가 된다.
뒤돌아보는 목적은 분명하다.
“Learn from yesterday, live for today, hope for tomorrow. The important thing is not to stop questioning.”
망각이 심해져서 글쓰기가 불가능해질 때까지 과거로부터 교훈을 얻고 싶기 때문이며, 죽을 때까지 질문을 계속하고 싶기 때문이다. 비록 어떤 교훈도 구하지 못하고, 질문에 대한 어떤 답도 발견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지난 토요일 새벽 운동 중에 찍은 사진. 비슷한 시간인데도 오늘은 너무 컴컴해서 사진을 찍을 수 없었다. 날이 급속도로 짧아지고 있다는 증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