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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추조 Jan 20. 2017

일구이언의 못난 기억

나는 쪼잔한 인간이다. 부끄럽고 창피한 과거를 많이 가졌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그런 기억들이 자주 되살아나 괴롭힌다. 불면의 밤에는 그 일들이 마치 엊그제 일어난 듯 더 생생하게 떠올라 수면을 방해한다. 그중에도 가장 악몽 같은 추억을 꺼내본다. 지금도 그 일이 떠오르면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다. 내가 얼마나 형편없고 못난 인간인지는 이 이야기가 증명하고도 남는다.


1970년대 중반 대학 2학년이었다. 90% 이상 절대다수가 남자들이었던 공대에 여자 신입생 몇 명이 우리 과에 입학했다. 우리 학번에는 여학생이 단 한 명도 없었다. 서클활동으로 바둑을 두는 기우회와 연극을 하는 극회에서 활동했다. 연극에는 손톱만큼도 지식이나 관심도 없었으나 신입생 시절 우연하게도 연극반 신입회원을 모집하는 강의실에 두었던 책가방을 가지러 갔다가 선배들에게 붙잡혀 협박 같은 강요에 의해 가입하고 활동했던 터였다.


연극반 선후배들은 서클의 성격상 자주 모였으며 모임답게 인물들이 많았다. 그 가운데 회장인 K선배는 유머와 열정과 리더십과 '끼'가 유별났다. ROTC로 작은 키에 눈에 띄는 미남이었던 그는 어떤 상황에서도 어울리는 뛰어난 말솜씨를 가졌다. 그와 함께 하는 시간은 배꼽을 잡고 웃는 시간이었다. 연극 연습으로 늦게 귀가할 때면 남대문 시장 분식집에 들러 떡볶이와 어묵을 먹으며 간단한 게임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도 했던 기억이 아스라하다.


이런 연극반에 1년 후배 ㅇ이 들어왔다. 예쁘고 말고를 떠나 여학생이 있다는 자체가 신기했다. ㅇ이 미팅을 주선했다. 자기 고등학교 동창들과 2, 3학년 선배들이 대상이었다. 지금은 없어진 광화문 국제극장 뒷골목의 다방에서 만났다. 요즘처럼 해가 짧았던 시기였나 보다. 깜깜한 밤이었다. 내 파트너는 ㅇ의 절친이었다. 첫눈에도 못생겼다는 느낌이 들었다. ㅇ보다 훨씬 못했다. 그러거나 저러거나 나는 좌중을 압도했다. 생맥주라도 한 잔 걸쳤는지는 기억에 없지만, 총기가 넘쳤던 시절이라 유머와 재치로 분위기를 이끌었다. 여자 아이들이 내 '끼'에 포복절도하고 뒤집어지기를 여러 차례 반복했다.


축제기간이었다. 연극 공연은 축제의 몇 안 되는 관심사였다. 축제 한 달 전부터는 모든 것을 전폐하고 연습에 몰두했다. 밤을 새우는 것도 일상이었다. 연습에 몰두하느라 그랬다는 그럴듯한 핑곗거리는 있었으나, 나는 내 또래의 여학생들에게 별로 인기가 없었는지 마땅한 파트너가 없었다. 비듬투성이의 장발에다 도수 높은 안경을 낀 가난한 대학생을 누가 좋아할까. 내 호주머니에는 늘상 버스표 두 장이 전부였다. 그래도 대학 축제이지 않는가. 파트너가 필요했다.


ㅇ에게 미팅에서 만났던 그 친구를 파트너로 초청해 달라고 부탁했다. ㅇ은 그래도 되겠느냐며 되물었다. 뭐 어떠냐고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마지막 공연이 끝나면 무대 장식을 뜯어내어 태우면서 캠프파이어와 쌍쌍파티를 하는 것이 연극반의 관례였다. 그 쌍쌍파티에서 싱글로 쪽팔리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 이후에도 ㅇ은 내게 정말 괜찮겠느냐며 몇 번 되물었고, 그때마다 나는 똑같은 대답을 아무렇지 않게 했다.


드디어 축제날 그녀가 왔다. 이런 표현을 하는 내가 부끄럽기 짝이 없지만, 밝은 대낮에 본 그녀는 못 생겨도 너무 심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딴에는 머리도 하고 화장도 한 모양이었다. 달덩이 같이 큰 얼굴은 도저히 똑바로 쳐다보기도 힘들었다. 갑자기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이 난관을 어떻게 극복해야 할까. 거짓말밖에 생각나지 않았다.


“어이, 네 파트너냐! 잘 해봐라.” 다른 과에 다니는 친구 녀석이 나를 향해 큰 소리로 말하고 지나갔다. 내게는 비웃음처럼 들렸다. ‘병신 같은 자식, 그렇게 생긴 여자를 파트너라고 데려왔냐?’ 꼭 그렇게 들렸다. 나는 일구이언을 하고 말았다. 집에 큰일이 생겨 갑자기 가야 한다는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늘어놓았다. 그녀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두말하지 않고 돌아갔다.


그 일은 곧 잊혔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세월은 흘러갔다. 나는 졸업을 했고, 취직을 했으며 수순에 따라 군대에 갔다. 말년 휴가를 나왔을 때로 기억한다. 무슨 일로 학교에 갔었는지 생각나지 않는다. 어쨌든 나는 학교에 들려 일을 마치고 돌아가려고 버스에 올랐다. 거기에서 ㅇ을 만났다. 깔끔한 정장을 한 그녀는 대학생이 아니라 어엿한 숙녀가 되어 있었다. 엔지니어로 국영 TV 방송국에 다닌다는 그녀는, 반가워하는 내게 쌀쌀맞게 굴었다. 어안이 벙벙해있는 내게 그녀는 과거에 있었던 자기 친구의 일을 떠올렸다.


아, 가해자는 까맣게 잊고 살았지만, 피해자는 지난 일을 몇 년 동안이나 간직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아, 나는 왜 그때 그녀를 데리고 떳떳하게 쌍쌍파티에 참석하지 않았을까. 못 생긴 게 무슨 죄라고 그녀를 데리고 재미있게 노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을까. 그리고 왜 아무 죄 없는 사람에게 커다란 상처를 주었을까. 왜 그렇게 쪼잔하게 굴었을까.


나는 이 수치스러운 기억을 평생 간직하고 살고 있다. 다시는 일구이언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인생이 절단 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도 나는 내가 뱉은 말은 지키기 위해 애썼다. 일구이언하지 않으려고 하다가 수천만 원을 날리기도 했지만, 그런 선택을 후회할 뿐 잘못했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지금은 할머니가 되어 있을지도 모를 그녀를, 가능하다면 꼭 한 번 다시 만나고 싶다. 그리고 그녀 앞에 무릎을 꿇고 싶다.


쪼잔하고 비굴한 인간을 용서하고 놓아 달라고. 그렇게 해서라도 나 자신에게 용서를 구해야만 한다. 불현듯 찾아오는 불면의 고통에서 해방되기 위해서라면.


60년밖에 안 되는 삶의 무게가 이토록 무거운 이유는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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