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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추조 Jan 24. 2017

유엔과 사무총장

60대가 보는 유엔

1950년대 중반에 태어난 60대나 그 이전 세대에게 유엔은 어느 세대보다 특별하다. 어렸을 때 우리는 유엔의 구호품으로 연명했다. 학교에서는 옥수수 가루로 만든 빵이나 우유덩어리를 아이들에게 배급했고, 집에서는 유엔기와 태극기가 표시된 손이 악수하는 모습이 그려진 배급 밀가루로 수제비나 칼국수를 만들어 끼니를 대신했다. 이스트와 막걸리로 발효시켜 만든 빵은 배곯던 시절에 가장 좋아하는 간식이었다.


(대부분 미군이었지만 명목상으로는) 유엔군 도움으로 공산화 일보 직전에서 나라를 건진 한국전쟁의 잔재가 남아 있던 가운데, 어린 시절을 보낸  우리에게 유엔이 얼마나 대단한 존재이었는지 요즘 사람들은 짐작조차 힘들지 모른다. 1945년 UN의 창설기념일인 10월 24일은 '유엔데이'라는 국경일이었고, 유엔 사무총장 이름은 단골로 출제되는 시험문제였다. 나는 아직도 그 시절의 유엔 사무총장의 이름 '우탄트'를 기억하고 있다. 남북한이 동시에 유엔에 가입한 것이 1991년이었으니, 유엔 회원국이 아니었는데도 그랬다. 그전까지 북한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았던 정부가 단독가입을 추진한 탓에, 상임이사국인 소련의 반대로 유엔 회원국이 될 수 없었다.


그런 유엔의 수장인 사무총장에 한국인이 선출된 것은 민족으로서 쾌거이었다. 미국에 살면서 한국소식에 별 관심을 두지 않고 지냈음에도 불구하고, 2천 년대 들어 한국에서 들려오는 뉴스는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김대중 대통령의 방북, 노벨 평화상 수상, 한일 월드컵 4강 진출 등 굵직굵직한 소식을 전하는 CNN 뉴스를 보면서 한국인으로서 자부심을 갖기에 충분했다. 3김과 그 추종세력이 주도하는 한국 정치에서 '노무현'이라는 '듣보잡(?)'이 대통령에 당선된 것도 엄청난 사건인 터에, 유엔 사무총장까지 한국인이 차지했으니 더 할 말이 없었다.


유엔은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승전국이었던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 중국 등 5개국이 만든 국제기구다. 소련은 해체되기 전의 소비에트 연방으로 지금의 러시아고, 중국은 대만으로 쫓겨나기 전의 장개석의 중국이었다. 유엔은 사회과목에서 중요하게 취급되었다. 출신 국가는 모르면서 사무총장의 이름을 외웠고, 회원국 수와 상임이사국 의결과정도 시험에 자주 출제되는 암기사항이었다. 회원국도 아니면서 유엔을 공부하는 것이 어린 마음에도 의아했었다. 나이를 먹으면서 유엔에 대한 관심도는 사라졌다.


유엔에 대해 다시 듣게 된 것은 이민으로 뉴저지에서 살면서다. 15~6년 전 어느 가족모임에서 유엔에서 근무하는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 육사를 졸업하고 임관 후 장교로 근무하다가 미국에 국비유학을 했다는 그분의 경력은 화려했다. 의무복무기한을 마치고 예편한 뒤, 미국 회사에 취직하여 일하던 중에 유엔에서 행정관(Officer)을 채용한다는 구인광고를 보고 응시했다는 그분에게 유엔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4만 명이 넘는 직원을 세계 곳곳에 두고 있는 유엔은 사무총장 밑에 사무차장이 있고, 행정관은 사무차장으로부터 지휘를 받는데 실무를 담당하는 행정관의 권력이 막강하다. 그분은 동티모르와 코소보 분쟁지역에 파견되었던 경력이 있는데, 유엔의 행정관으로서 현지에 파견되어 유엔에 올리는 보고서에 의해 국민투표 일정이나 정권이양 방법 등 그 나라의 운명이 결정된다. 행정관은 현지 사정에 따라 현지인을 채용할 권한도 있어서 현지인들에게는 그야말로 엄청난 권력이라고 했다. 이것은 우리나라의 역사를 회고해도 충분히 이해된다.


유엔은 회원국들이 내는 분담금으로 운영되는데 22% 이상을 내는 미국이 압도적이며 일본(10%)과 독일(7%)이 뒤를 잇는다. 현재는 G2로 부상한 중국이 일본에 이어 3위다. 한국도 국제적 위상이 높아지면서 비교적 높은 1~2%의 분담금을 부담하며 이 정도로도 10위권의 상위에 랭크되고 있다. 돈의 위력은 국제사회에서도 그대로 통용된다. 따라서 유엔 내 한국의 입지도 전과 같지 않아서, 외국어와 국제관계 지식과 같은 능력만 있으면 행정관으로 취업할 수 있는 길이 한국인에게도 얼마든지 열려있는 셈이다. 행정관의 연봉은 15만 불이며, 소득세는 본인의 선택으로 유엔본부가 있는 미국이나 출신국에 낼 수도 있다. 지금은 어떻게 바뀌었는지는 알지 못한다.


귀국한 반기문 씨가 세계의 대통령이니, 유엔의 수장이니 하며 우리 같은 낡은 세대들에게 추앙을 받는 것으로 뉴스에서 보도하는 것을 본다. 하지만 유엔의 사무총장은 세계의 대통령도 유엔의 수장도 아니다. 단지, 유엔 사무국의 수장이며 4만 명이 넘는 유엔 직원들을 총괄하는 책무가 주어지는 자리다. 유엔의 수장은 사무총장이 아니라, 안전보장 이사회이며 그중에서도 유엔 창설을 주도한 5개의 상임이사국이고, 그중에서도 20%가 넘는 분담금을 내는 미국이 실질적 수장인 것이다. 뉴욕을 방문하면 필수코스인 유엔본부도 미국에 있다.


유엔의 사무총장으로 지내는 10년 동안 약소국의 입장을 대변하기보다는 미국과 러시아의 눈치를 보며, '기름장어'로서의 재능을 마음껏 뽐낸 반기문 씨가 과대평가받는 모습을 보며 쓴웃음을 짓는다. 젊은 사람들은 이해하기 힘들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에게 유엔이라는 존재는 공산화의 위기에서 조국과 민족을 구해준 은인이나 다름없으며, 그렇게 교육받으며 자란 꼰대(?)들에게 반기문 씨는 위인처럼 떠받들여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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