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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추조 Mar 11. 2017

'Better Life'를 찾아서(끝)

여행의 추억


2008년 미국에 찾아온 금융위기로 갑작스럽게 레이오프 되었어도, 화가 나고 실망은 했을지언정 낙담까지 하지 않았던 것은, 같이 일하자는 사람도 주변에 없지 않았고 또한 낙천적인 내 성격도 한몫했기 때문일 것이다. 줄어들 수입이 아쉬웠을 뿐, 아이들이 다 컸고 집도 있고 빚이 없던 내 형편이 그리 나쁘지만은 않았다. 하지만 한두 달이 지나면서 돌아가는 경제상황이 갈수록 어려워지자 주변 사람들도 점차 말을 바꿨고 다시 직업을 구하는 일은 요원해져 갔다.


그래서 떠난 여행이었다. 현실을 떠나 마음을 정리하며 당혹감과 울화를 다스려야 했다. 무엇이 최선일까? 최악은 어떤 결과일까?


미국의 동쪽 끝으로만 다녔다. 뉴저지 남쪽 끝 '케이프 메이(Cape May)'에서 카페리를 타고 델라웨어 루이스로 갔고, 거기서 동쪽 해변을 따라 버지니아 비치로, 거기서 동쪽 끝으로 노스캐롤라이나 아우터 뱅크(Outer Bank)를 따라 남쪽으로 내려갔다. 미국 동부 지도를 보면 지렁이 모양의 섬들이 길게 이어진 곳인데, 이곳 끝에서 내륙으로 들어가려면 다시 카페리를 이용해 한 시간 반 정도 가야 한다. 요금은 승용차와 함께 두 사람이 $15불이었다. 싼 요금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 페리가 출발하자 갈매기들이 따라붙었다.


▼ 반대편으로 돌아가는 카페리. 여러 개의 섬으로 된 이 루트를 통과하여 다시 내륙으로 들어가려면 몇 번의 이런 페리를 거쳐야 한다. 도로번호가 계속 이어져있던 걸로 봐서, 노스캐롤라이나 교통국(DOT)에서는 이 페리도 도로의 일부분으로 간주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페리 요금도 톨비 정도로 싼 모양이다.


▼ 처음에는 이 갈매기들이 왜 페리를 따라오는지 몰랐다. 땅에서 멀어지면서 갈수록 그 숫자가 늘어났다. 


▼ 이유는 간단했다. 빵(먹이)을 던져주기 때문이었다. 이 배에는 수학여행을 가는 듯 보이는 초등학생 아이들이 타고 있었는데, 식빵을 한 봉지씩 들고 내려가 재미 삼아 빵을 던져주었다. 많은 아이들이 그러는 것으로 보아 교사들이 교육의 목적으로 일부러 시킨 일인지도 모르겠다. 갈매기들이 페리를 따라다니면 힘들이지 않고 먹이를 구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 먹이를 구한다는 것은 갈매기들에게도 쉬운 일이 아닌가 보다. 이 많은 갈매기들이 스스로 먹이를 찾지 않고, 페리를 쫓아다니는 것을 보면서 생가했다. 아이들이 던져주는 것을 서로 차지하기 위해 저희들끼리 다투었다.


▼ 페리에서 보는 석양이 무척 아름다웠다.


▼ 페리에서 기념사진도 한 컷.


▼ 당시 목적지였던, 사우스 캐롤라이너 남동쪽 끝 'Hilton Head Island'로 이곳에서 며칠 묵었다. 이곳에서도 빵조각을 던져주는 아이 주변에 갈매기가 모여든다. 힘들이지 않고 먹이를 얻으려는 생명체는 어디에나 똑 같았다. 


LA에 살던 2010년의 일이다. 한국에서 온 처갓집 식구들과 캘리포니아를 여행했다. 샌프란시스코 남쪽 해변 하프문(Half Moon)베이의 피어(Pier)에서 점심을 먹었는데 다리가 하나뿐인 갈매기가 보였다. 웨이트리스에게 외다리 갈매기에 대해 물어보았더니, 사람이 던져주는 먹이만 먹다 보니 당뇨 비슷한 병에 걸려 다리를 잃었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사실일까?라는 의문이 들기는 했지만 그 갈매기가 주는 교훈은 작지 않았다.


동부에서 본 갈매기는 카페리를 쫓아다니는 수고라도 했다. 서부에서 본 이 갈매기는 피어에 있는 레스토랑 옆 난간에 앉아서 사람들이 던져주는 음식 부스러기를 주워 먹기만 할 뿐이다. 전혀 수고하지 않고 편하게 앉아서 먹이를 구하는 이 갈매기가 한쪽 다리를 잃은 것이 혹시 자연의 법칙이 아닐까?


▼ 서부의 갈매기다. 동부의 대서양 갈매기보다는 순하게 생겼다. 거칠지 않은 태평양에서 태어난 때문일까?


▼ Better Life를 찾아 나섰다가 상처의 기억을 갖고 돌아온 나는 혹시 이런 모습이 아닐까? 힘들여 일하지 않고, 편한 삶을 찾은 이 불구의 새는 과연 행복할까? 이런저런 생각들이 꼬리를 문다.


자연의 법칙


나는 자연이 좋다. 그래서 틈만 나면 자주 보는 것이 자연 다큐멘터리다. 최근에는 마다가스카르, 갈라파고스, ‘호주 대산호초(Great Barrier Reef)’, ‘시베리아의 생명들’, ‘아시아 대평원’, ‘극한의 땅’ 같은 다큐를 보았다.


혹등고래는 번식 장소에서 태어난 새끼를 데리고 먹이를 찾아 북극권으로 11,000Km를 이동한다. ‘개코원숭이’는 새끼가 위험에 처하자 죽기를 무릅쓰고 사자에게 덤벼들어 사자를 물리치고, 죽은 새끼를 4일 동안이나 데리고 다니고 나서야 포기한다. 시베리아의 네 발가락 도롱뇽은 영하 40도에서도 생존한다. 아르갈리 양은 25마리까지의 암컷을 거느리는데, 다른 수컷이 도전해오면 시속 100Km의 속력으로 머리를 부딪쳐 승패를 결정한다. 보다 강한 수놈이 암놈을 잉태시켜 보다 강한 유전자로 종족을 유지시키기 위함이다.


모든 살아있는 것은 먹을 것이 필요하다. 살아남기 위해, 종족을 유지하기 위해 살아있는 모든 생명체는 먹을 것을 찾아 생명을 걸기도 하고, 그런 위험은 더 능률적이고 더 효율적인 방법을 찾아 진화하는 동력이 된다. 하지만 먹을 것에 지나치게 쉽게 노출되는 생명체는 긴장감을 잃게 되고, 느슨해진 긴장감은 쉽게 생명체의 활력을 잃게 만든다. 27대에 걸친 조선의 임금들의 평균수명이 40대 중반에 그친 것도 마찬가지 논리 아닐까. 아무런 공도 들이지 않고 먹이를 얻는 갈매기가 한쪽 다리를 잃고 사는 것처럼. 그게 자연이라는 신이 만든 법칙이다.


의식주는 인간이 살아가는데 반드시 필요한 것이지만, 의식주를 다 갖추었다고 해서 만족하는 사람은 없다. 창조주가 만든 피조물 중에 만족을 모르는 유일한 피조물이 바로 인간이다. 백만 불을 가진 사람은 이백만 불을 가져야만 할 수 있는 일을 생각하고 그것에 매달리며 행복에서 멀어진다. 이백만 불을 갖게 돼도 역시 마찬가지다. 이러한 인간의 본질을 일찌감치 깨달은 선지자들은 말한다. 욕심을 버리라고, 마음을 비우라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가진 것을 나누라고.


아프리카의 사자는 사냥감을 먹다가 배가 부르면, 다른 동물들이 먹을 수 있게 그 자리에 놓고 떠난다. 인간은 그렇지 않다. 오히려 다른 사람이 가져갈까 봐 금고에 숨기고 은행에 두고 자물쇠로 꽁꽁 채워둔다. 자연의 법칙에 거스르는 피조물은 인간이 유일하고, 그 인간들이 겪어야 하는 고통은 피할 수 없는 숙명이 된다.


부족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작은 것에도 만족하지만, 다 가진 사람은 큰 것에도 만족을 모른다. 시큼한 김치와 꽁치 한 토막으로도 맛있고 행복한 식사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산해진미에도 만족하지 못하고 더 좋은 음식을 찾는 사람도 있다. 상대적인 만족감은 꽁치 한토막이 더 클 수도 있다.


행복은 마음속에 있다. ‘Better Life’도 다른 곳에 있지 않다, 마음에서 찾아야 한다. 예수님도 부처님도 마음에 존재한다고 하지 않던가.


<후기>

Better Life를 찾아 이민을 스스로 선택했던 내게, 그것의 실체가 어떤 것이었는지 이제 와서 뒤늦게 생각해 보는 것은 어리석은 일일 겁니다. 이민을 포기하고 돌아온 주제에 가당치 않은 말을 한다고 꾸짖어도 아무 말도 못 하는 실패자일 뿐이라는 것을 모르는 것도 아닙니다. 당시로서는 나와 내 가족을 위해 최선의 선택을 했다고 자위할 뿐이지요.


하지만 그 의미가 무엇이었느냐는 것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하는 것만은 놓고 싶지 않습니다. 더 나아가서 인생의 의미, 행복은 어디에서 오는가와 같은 근원적인 문제에 대해서도 평범하게 살았던 실패한 인간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도 의미 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보통사람들은 위대한 사람들보다는 비슷한 평범한 사람에게서 더 많이 위로받고 공감을 느낄 거라는 것이 이유입니다.


북한 주민들에게는 배고프지 않은 삶을 찾아 탈북하고, 어떤 사람들은 부정부패가 없는 사회를 찾아가기도 하고, 또 어떤 이들은 내전을 피해 목숨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조국을 떠납니다. 성차별, 인종차별이 없는 세상이나, 가난이 없고 자유로운 사회를 찾아가는 것도 모두 궁극적인 목표는 ‘Better Life’, 다시 말하면 ‘Happier World’를 찾아가는 여정일 것입니다. 그 여정을 거의 끝낸 저는 남은 인생은 그것을 반추하며 살겠지요.


좀 더 좋은 글을 쓰고 싶은 욕심은 있지만, 능력이 따라가 주질 않은 탓에 이번 글은 여기서 가름합니다. 부족한 글을 끝까지 읽어준 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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