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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추조 Mar 12. 2017

21세기 이민(移民)

4~50년 전에는 농촌에서 서울로 서울로 몰려드는 인구집중이 심각한 문제였다. 1975년 서울 인구가 500만을 돌파하고 10년쯤 지나서 1980년대 말 천만을 돌파하자, 팽창하는 서울의 인구를 수용하기 위해 수도권에 신도시가 들어서고, 교통난을 해소하기 위해 지하철을 건설하느라 곳곳이 파헤쳐져 교통혼잡은 극에 달했었다.


일찌감치 이민을 떠나 그 당시의 서울을 경험하지 못한 분들은 모르겠지만, 당시 서울에서 살았던 사람들은 지하철 공사장 위에 깐 철판 위를 덜커덩거리며 지나는 버스 속에서 극심한 정체를 경험하며 출퇴근에 마냥 시간을 허비하기도 했다. 주말에 가족들과 함께 나들이라도 갈라치면 고속도로는 주차장이나 다름없었다.


회사 산악회를 이끌고 관광버스를 대절하여 설악산 무박 2일 - 토요일 오전 근무를 마치고 그날 밤에 출발해서 새벽 2~3시에 시작하는 산행을 마치고 오색약수 근처에서 단체로 점심을 먹은 후, 1시 반에 출발했는데 밤 10시가 다 되어 회사가 있는 여의도에 도착했다. 누군가에게 들은 이야기지만, 추석 명절에 쟈니윤과 조영남이 헤어져 자니윤은 LA로 조영남 씨는 부산으로 출발했다. LA 집에 도착한 쟈니윤이 잘 도착했다는 안부를 전하기 위해 조영남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조영남은 그때까지도 경부고속도로에 있었다.


교통지옥 하나만 생각해도 나라를 떠나고 싶었다. 게다가 가정과 직장 등 삶의 무게가 던져주는 스트레스도 심했다. 매스컴에서는 서울의 공기오염이 최악의 수준이라고 난리 치고, 팔당댐 식수 오염이 어떻다는 등 서울은 사람 살 곳이 못 되는 것처럼 떠들었다. 도대체 이 나라를 떠날 이유밖에 없었다. 이 나라만 떠나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 같고, 저 언덕만 넘어가면 행복의 파랑새는 손 안으로 들어올 것만 같다.


하지만 이미 갖고 있고 누리고 있는 것들은 보이지 않았다. 이미 양 손에는 빨간 새, 노란 새, 주황 새, 초록 새 등 온갖 새들을 지니고 있었다. 오직 없는 파랑새 마저 잡으려고 손을 펼치는 순간 갖고 있던 모든 새들은 날아갔다. 정년까지 보장되어 있던 직장도, 어떤 고민도 들어주던 친구도, 수시로 왕래하던 가족도, 아무런 긴장 없이 술술 구사하던 언어도, 이해하는데 사전이 필요 없던 글도 잃어버리고 허허벌판 낯선 곳으로 스스로 나아갔다.


파랑새는 잡았는지 모르지만 - 그것마저 놓친 사람들이 더 많지만, 빨간 새를 비롯한 수중의 모든 새들은 이미 저 멀리 날아간 뒤였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수중에 없는 파랑새만 쫓아 갖고 있는 모든 새들을 날려 보내는 우(愚)를 범한다. 20년 전 내가 저질렀던 같은 똑같은 어리석음이 아직도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다.


- 아빠가 저희들에게 무슨 뜻으로 그렇게 말하는지 잘 알아요. 레슨을 줘서 아빠가 겪었던 시행착오를 저희는 겪지 말라는 거잖아요! 그런데 저희도 그냥 아빠가 겪었던 잘못 똑같이 겪으면서 살 거예요. 왜냐면 자기가 경험하지 않으면 모르는 게 사람이잖아요.


너무 똑똑해서 탈(?)이었던 딸이 하이스쿨 다닐 때 했던 말이다. 그래, 네 말이 맞다. 어리석게 살아온 아빠가 제 주제는 파악 못하고, 아비 노릇한답시고 딸에게까지 어리석은 말을 했구나!


그래도 나는 어리석은 짓을 되풀이한다. 그래서 오늘도 이렇게 어리석은 글도 쓰고, 어제도 전화로 일면식도 없는 젊은이에게 파랑새를 잡으려 하지 말라고 어리석은 충고를 했다.


<후기>

지금 한국 인구의 절반 가까이가 수도권에 거주한다고 합니다. 인구 천만에 호들갑을 떨었지만, 그건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지하철이 골목까지 누비고 다니고, 외곽 순환도로가 생기고, 서해고속도로에, 고속철도까지 한국은 나라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도시처럼 변하고 있습니다.


지난 세월의 어려움은 더 살기 좋은 새로운 세상을 잉태하기 위한 고통이었을 겁니다. 그 작은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떠났기에 미국에서도, 한국에서도 아웃사이더로 살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아이들도 미국에서 영원히 마이너리티로 살게 되겠지요. 그러나 후회는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아픈 만큼 성숙해진다는 유행가 가사처럼, 그랬기에 인생을 보다 깊이 있게 바라보게 되었고, 다른 사람이 경험하지 못한 깨달음도 얻었다고 믿습니다.


경제적 차이가 크게 났던 옛날에는 경제력 차이 하나만으로도 충분한 이유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7, 80년대도 아닌 '21세기의 이민'은 단순하게 결정해서는 안 될 겁니다. 잃을 것이 없는 젊은이들이야 뭐 할 말 없습니다만, 잃는 것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7, 80년대가 아닌, 저처럼 1990년대에 이민 가신 분들 중에 고생하시는 분들을 너무 많이 보았습니다. 인건비 아끼려고 사람을 쓰지 않고 세탁소에서 무리하다가 쓰러져 앰뷸런스에 실려가고, 일주일에 세븐데이 하루 열서너 시간을 리쿼 스토어 지키는 분들을 보며 인생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잘 된 분들도 없지 않습니다. 


어제 통화했던 그 젊은이는 이민에서 얻고자 했던 맑은 공기에서 숨 쉬는 대신에, 잃어야 할 것이 너무도 많았습니다. 와이프의 평생직장, 한 달에 5~6백만 원의 고정수입, 편하고 낯익은 언어와 환경, 친구와 가족 등. 그것이 미세먼지 없는 공기와 바꿀만한 가치가 있을까요?


이미 여러 번 반복한 이야기를 또 합니다. 헤르만 헷세는 데미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껍질이 깨지는 아픔 없이는 새로운 세상을 만날 수 없다고. 그러나 그런 아픔도 보다 가치 있는 일을 위할 때 더 빛이 나겠지요.


어리석은 제 생각이었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Better Life'를 찾아서(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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