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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추조 Jun 01. 2017

맨해튼에서 본 '그 꽃'

누군가는 말했다. 행복은 주위에서 줍는 것이라고, 먼 데서 찾는 것이 아니라고, 어려운 것이 결코 아니라고. 하지만 가까운 곳에서 행복을 줍거나, 쉽게 수확하며 사는 사람이 그리 많아 보이지는 않는다. ‘싼 게 비지떡’이라는 상식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비쌀수록 더 잘 팔린다는 한국인들에게 행복이라는 감정도 그런 것이 아닐까.


여행이라는 것도 그런 관점에서 살펴보았다. 서울에서 태어나 살면서 몇 번이나 남산에 가봤을까. 십 년 가까이 여의도로 출퇴근하면서 63 빌딩에는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다. 굳이 멀리 가야지만 여행이고 관광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아닐까. 작년 봄에 남산에 올랐을 때 수많은 관광객을 보았다. 중국인으로 보이는 사람들은 만개한 벚꽃에 즐거워하며 사진 찍기에 열심인 것을 보고 혼자 쓴웃음을 지었다.


미국에 살면서도 마찬가지였다. 세계에서 가장 관광객이 많이 찾는다는 가까운 뉴욕을 두고, 굳이 아이들을 끌고, 굳이 멀리 다녔었다. 천 마일도 넘는 플로리다를 며칠씩 걸려 승용차로 갔다 왔고, 캐나다에 다녀왔으며, 버지니아, 버몬트, 뉴햄프셔 등 타주를 주로 관광하러 다녔다. 등잔 밑이 어두운 것일까. 눈앞에 볼거리를 두고도 멀리서 찾은 것은, 주변에 널린 행복을 두고 먼 곳에 있는 값비싼 만족을 찾으러 다닌 것과 다름없다.


지난주에는 카페 친구와 함께 맨해튼을 다시 나갔다. 59가에서 시작하는 중앙공원(Central Park)을 끝나는 110가까지 지그재그로 걸었다. 뉴욕이 자랑하는 공원답게 그 규모에 다시 놀랐다. 섬인 맨해튼 한가운데 자리 잡은 공원은 엄청난 크기의 호수부터 작은 호수까지, 적당한 높이의 언덕부터 흙길로 이루어진 트래킹 코스까지 다양한 볼거리를 연출했다. 


1857년에 처음 문을 연 뒤, 한 해 3천만 명이 넘은 방문객이 다녀 간다고 한다. 160년 전에 섬 전체의 5.7%에 해당하는 면적의 공원을 만들 생각을 했다는 것이 더 놀랍다. - 실제 계획은 훨씬 이전일 것이다. - 뉴저지 덴빌에 살 때는 걸어서 15분 거리에 있는 역에서 기차로 1시간 남짓이면 펜스테이션에 갈 수 있었고, 거기서 지하철로 서너 정거장이면 중앙공원이었다. 그런 곳을 이곳을 떠난 뒤에야 매주 찾고 있는 것이다.


물론 핑계는 있었다. 그 복잡한 맨해튼에 뭐 하러 나가? 서울에 살 때도 그랬다. 남산? 63 빌딩? 그런 곳은 촌놈(?)들이나 가는 곳이지 뭐 볼 거 있다고 가? 무너지기 전의 쌍둥이 빌딩(월드 트레이드 센터)도 한국에서 손님이 오는 바람에 두어 번 가보았을 뿐, 손님이 없었다면 영원히 미답으로 남았을 것이 틀림없다.


욕심이자 어리석음이다. 그런 점에서 욕심과 어리석음은 다른 말 같지만 실상은 동의어다. 욕심은 어리석음을 부르고 어리석기에 욕심이 일렁거린다. 제주에서 올레길을 걸으면서 그것을 느꼈다. 해변과 숲길을 걸으면서, 이름도 낯선 오름을 힘들게 오르면서, 한적하고 조용한 옛 동네를 느릿느릿 어슬렁거리며 어디서도 못 누린 행복감과 못 본 아름다움을 느꼈다. 이야, 세상에 이런 곳이 다 있네! 


버리니까 보였고, 버리니까 느껴졌다. 버리니까 현명해졌고, 현명해진(?) 탓인지 제주의 수수한 올레길이나 맨해튼의 웅장한 중앙공원이나 거기서 거기였다. 스케일은 달랐지만 감동은 별 차이가 없다. 오직 놀라운 것은 200여 년 전에 이런 공원을 만들 생각을 한 미국인들의 상상력이다.


McSorley’s Old Ale House’는 뉴욕에서 가장 오래된 아이리쉬 술집(Pub)으로 로우 맨해튼 쿠퍼 유니온 오른쪽 골목길 맞은편에 있으며, 중앙공원보다 3년 빨리 문을 열었다고 한다. 술은 맥주 한 종류로 두 가지다. 다크(Dark)와 라이트(Light)로 가격은 두 잔에 5불 50센트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톱밥(Saw Dust)을 마룻바닥에 뿌려놓았다. 믿거나 말거나 163년 전 인테리어 그대로라고 한다.


1894년 발발한 동학혁명보다 40년이나 앞서 생긴 술집이 현재도 그 자리에 그대로 있다는 것이 경이롭다. 실내가 넓지는 않았으나 오후 3시가 넘었을 뿐인데도 테이블은 고사하고 서있는 것조차 불편했다. 카운터의 빈 구석으로 다가가자 바텐더가 “Dark or Light?”라고 물었다. “Two Dark”라고 대답하자 작아 보이는 네 개의 잔에 맥주를 붓더니 우리 앞에 내려놓으며 11불을 요구했다. 영어가 짧을 때는 눈치라도 빨라야 한다. 한 사람당 최소 주문 단위가 두 잔이라는 걸 금방 알아차렸다.


그 곳이 비어있는 이유를 알기에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웨이터가 테이블 손님들에게 맥주를 나르는 곳이었다. 빈 테이블이 없어서 앉으려면 합석할 수밖에 없었다. 도수 높은 안경을 걸친 젊은 친구가 홀로 앉은 테이블로 옮겼다. 아이오와 출신의 그는 4살짜리 아들이 있으며 금융 쪽에서 일한다고 했다. 나이든 사람은커녕 동양인도 우리가 유일했다. 1970년까지는 남자만 출입이 허용되었다는 말도 그 아이오와 근시안에게 들었다. ‘치즈 플레이트’라는 안주도 시켰다.


기껏 맥주나 팔면서 남성 전용 술집이라니? 발 디딜 틈이 없는 술집에 앉아 혼자 무슨 맛으로 맥주를 마실까? 무슨 목적으로 마루에 톱밥을 깔아놓았을까? 치즈에 비스킷이 안주가 될까? 하얀 색 해군복장의 건너편 젊은 무리들은 뭐가 저리도 재밌을까? 저들은 내 젊은 시절보다 훨씬 현명해서, 가까운 주변에서 지금 행복을 줍고 있는 걸까? 가깝게 살 때는 꺼렸던 맨해튼을 제주에서 살면서 느끼고 있는 나는 어떤 놈일까?


고은 시인은 ‘그 꽃’이라는 제목의 시에서 열다섯 글자로 표현했다.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못 본

그 꽃


내가 본 것은 젊었을 때 못 보았던 그 꽃이었을까!


▼ 바텐더에게 사진을 찍어도 괜찮으냐고 물어보니, 바쁜 와중에도 포즈를 취해주었다. 손에 쥔 것이 다크 비어로 최소 주문이다.

▼ 루스벨트와 케네디 등 대통령 사진이 걸려있었다. 모두 이곳에 들렸던 대통령이라고 한다.

▼ 이 집의 메뉴판이다. 맨 아래에 적힌, '당신이 태어나기 전부터 우리는 이곳에 있었다'는 문귀가 재밌다.

▼ 남자 화장실의 여러 소변기 전체가 하나의 도자기로 되어 있어서 무척 고풍스러웠다. 7잔이나 마신 탓에 여러 번 이곳을 들려야 했다.

▼ 술집 입구로 간판에 1854년에 설립되었다고 한다. 실내 바닥에 뿌려진 톱밥이 보인다.

▼ 평범해 보이지 않는 건물이 쿠퍼 유니온 칼리지. 옐로캡이 지나가는 왼쪽 골목에 펍이 위치한다.

▼ 맨해튼의 가장 중심인 요지에 위치한 중앙공원. 고층건물들이 공원을 에워싸고 있다.

▼ 공원 내 다양한 모습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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