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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추조 Jun 05. 2017

미국에 돌아오고 싶지 않으세요?

돌아갈 시간이 가까워 올수록 아이들 집에 있는 게 불편해지기 시작한다. 아니, 불편해지기 시작하면서 내가 사는 둥지로, 그동안 익숙해져서 편안한 곳으로 돌아가고 싶은지도 모른다. 아이들 집에는 눈에 매우 익은 것들이 있어 나를 편안하게 해주는 게 재미있었다. 학생 시절 아이들이 쓰던 책상 일부가 거실 한쪽에 있어서 딸이 재택근무할 때 사용했고, 이불이며 냄비며 눈에 익은 가재도구와 주방용품들이 그랬다.


"너, 계속 제주에서 살 거냐?" 얼마 전에 콜로라도에 사는 친구와 장시간 통화를 했다. 가지 못하는 것을 전화로 대신한 셈이다. 통화 말미에 친구가 불쑥 물었다. "글쎄다, 여기서는 놀고먹을 수가 없으니 일이라도 있다면 혹 모르겠다, 네가 일거리를 찾아주면, 덴버에서 너나 의지해서 살아볼까?" 농담 삼아 튀어나온 말이었다.


전화를 끊고 나서 잠시 생각했다. 친구는 오래전부터 덴버에 올 수 있으면 오라고 했었다. 돌아올까? 덴버 같은 곳에서 방 한 칸짜리 아파트 얻어 사는 것은 아무 문제없을 것 아닌가. 오로라(Aurora)라는 지역에는 한인들이 많아 불편할 것도 없다. 어차피 나이 들면 한인 타운과 떨어져 살기는 힘들다.


옛 직장의 동료들도 만났다. 부서장으로 근무할 당시 10여 명의 부하직원들 중에 있던 두 명의 한국 직원들이다. 같은 한국인이라고 편드는 게 아니라 다른 직원들에 비해 그들은 특히 뛰어났다. 한 친구는 그 회사에서 정리해고당했다가, 고객지원(Customer Support)에 문제가 생기자 다시 채용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마음이 상한 그 친구는 결국 회사를 그만두었다. 다른 회사에 다니는 그들도 40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노안이 시작되었다고 했다. 저녁에 만나 소주 한잔 할 때였다. “부장님, 미국에 돌아오고 싶지 않으세요?” 옛 호칭을 사용하며 이렇게 물었다. 이렇게 답했다.


“글쎄다, 솔직히 미국 생각이 전혀 없다면 거짓이겠지. 처음에 한국에 갈 때는 이렇게 오래 있을 줄 몰랐으니까. 그런데 살다 보니 돌아갈 생각이 없어지더라. 그냥 거기가 편해. 뉴스를 보면 미세먼지에, 취업난에, 물가에 한국이 살 곳이 못 되는 것 같아도, 실제 살아보면 재미도 있고 마음도 편해. 물론 눈꼴사나운 경우도 없지 않지만, 그런 것은 어디에나 있는 것 아니냐. 가끔 남의 눈치 안 봐도 되고 넓고 깨끗한 미국이 그립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하나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건, 한국 살면서 미국이 생각나는 것보다 미국에서 살게 되면 한국이 더 많이 그리울 것 같다는 거야.”


스물한 살 때부터 나를 따라다닌 친구가 있다. 30년 전 승진 후 초임 발령을 받아갔을 때 만난 직원이었다. 공고를 나왔지만 일만큼은 끝내주게(?) 잘했다. 책임감도 투철했다. 선천성 장애가 있는 딸을 가진 이 친구가 내 반대를 무릅쓰고 무작정 미국까지 쫓아왔다. 우여곡절 끝에 내가 다니던 회사에 취직시켰고 영주권을 받았다. 아직도 그 회사에서 일하고 있는 그는 내 전화를 받고 득달같이 달려왔다.


“한국을 향해서는 오줌도 안 누겠다는 생각으로 한국을 떠났습니다. 한국에는 관심도 없어서 문재인이 어떻게 대통령이 되었는지 전혀 모릅니다.” 이미 50줄에 들어선 그는 완전 대머리가 되어 젊었을 때 보기 좋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인마, 나도 같은 생각이었어. 그런데 살다 보니 생각이라는 것도 바뀌더라. 부모나 자식이 못났다고 부모나 자식을 버릴 수 없는 거 아니냐? 조국도 그런 존재야. 너무 그렇게 단정하지 마라. 나와 그렇게 사이가 안 좋던 N실장도 고인이 됐어. 네 선배 K도 몇 년 전에 죽었다. 돌연사했다고 하더라. M 부장도 죽었고, K처장은 퇴직 후 자회사 전무가 되었다가 뇌물사건에 얽혀 감방에 갔다. 울진에 있던 T 있지, 걔가 처장이라고 한다. 시간이 가면 모든 게 바뀌고, 세월이 흐르면 변하지 않는 게 없더라. 내가 제주에 살 줄 상상이나 해봤겠냐? 게다가 이렇게 오래 지낼 줄을.”


이런저런 살아온 지난 이야기로 4시간을 보냈다. “제가 형님보다 손주를 먼저 볼 것 같습니다. 11월에 아들이 결혼하는데 벌써 임신했습니다.” “그래, 그거 잘 됐다. 너 머리 벗어진 거 보니까 손주 볼 자격은 충분하다.” 가는 친구를 차까지 바래다주었다. 차는 옛날 차 그대로였다. 맞아, 저 차를 함께 타고 2008년 초에 사우스캐롤라이나 머틀(Myrtle) 비치로 골프여행을 갔었지. 몇 달 후 닥칠 금융위기도 모르고 일 년도 안 돼 해고될 운명인 것도 까맣게 모른 채. 검은색 오디세이를 보고 그런 생각을 하는데, 반대쪽 창문을 내리더니 한마디 던지고 떠났다. “형님, 테이블 위에 봉투 하나 놓았습니다. 아이들하고 식사나 하십시오!”


그때는 한국이 정말 싫었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한국사회에 만연한 부조리가 싫었다. 일보다는 윗사람 눈치 보는 게 더 중요했고, 사업을 진행하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했으며 돈을 만드는 기술(?)이 있어야 했다. “회사에서 공식적으로 영업비를 마련해줄 방법이 없어. 그런 제도와 법규가 없으니까. 그러니 알아서들 만들어 써. 대신 걸리지만 마!” 사장이 간부회의에서 공식적으로 했던 말이다. 그러나 깔끔하게 처리한다고 해도 돈 만드는 기술을 쓰면 온갖 추접한 소문이 따라다녔다. -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이런 소문을 일부러 퍼트리는 인간이 부하들 가운데 있었다. 나무 위에 올려놓고 흔드는 꼴이었다.


이제는 돈 버는 일은 하지 않으니 부닥칠 일이 없다. 벌더라도 손발을 놀리는 일이지 책상에서 머리 쓰는 일이 아니며 벌어봤자 푼돈이다. 나무 위에 올라갈 일도 없고 흔들어대는 놈도 없다. 그래서 마음이 편하다. 굳이 이런 평화와 안락함을 깨고 다시 미국에 오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는다. 아이들도 멀리서 바라봐야 아름다운 꽃이다. 내가 살아온 방식과 너무나 다르게 살아가는 아이들이라 가까이 있으면 서로 불편하다.


미국에 오고 싶으냐고 물었니? 아니, 그냥 한국에서 살란다. 앞으로 이십 년 정도 더 살지 모르겠는데 그렇게 살다 가면 억울할 것도 없어. 이십 년, 금방이야. 제주에서 산 게 벌써 칠 년째다. 세 바퀴만 더 돌면 이십 년이잖아. 대신 아이들이 있고 손주들이 생길 거니까 가끔 다녀갈 테니, 옛정이나 잊지 말고 만나게 되면 소주나 한 잔 사라. 그럼 됐다. 그러려면 열심히 살고 건강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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