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삶
“I do not want to waste my life grooming myself for others' eyes. No matter what they think of me, that is their business, not mine. I am only responsible for explaining myself to myself.”
— Charles Cotton, The Essays of Montaigne
“나는 다른 사람의 눈에 비친 나를 가꾸기 위해 내 삶을 낭비하고 싶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든, 그것은 그들의 몫이지 나의 몫이 아닙니다.
나는 오직 나 자신에게만 설명할 책임이 있을 뿐입니다.”
어느 날 밤,
상대방과의 대화는 이미 끝났는데
머릿속에서는 여전히 문장이 이어집니다.
“그게 아니었는데.”
“나는 그런 의도가 아니었는데.”
“왜 그렇게 받아들였을까.”
상대는 이미 일상으로 돌아갔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혼자 남아 보내지 못한 해명을 되풀이합니다.
오십의 나이에도
타인의 오해는 여전히 마음을 건드립니다.
억울해서만은 아닙니다.
이해받지 못했다는 감각이
존재의 일부를 부정당한 느낌으로 번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설명하려 합니다.
사실을 바로잡기 위해서라기보다
내가 틀리지 않았다는 확인을 받고 싶어서.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타인의 이해는 애초에 완전할 수 없습니다.
사람은 각자의 경험과 두려움,
자신의 언어 안에서만 타인을 해석합니다.
내 삶의 맥락 전체를
누군가가 온전히 이해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정확히 이해받고 싶다”는 기대를 놓지 못합니다.
기대가 커질수록 설명이 길어집니다.
그럴수록 나는 점점 타인의 평가에 매달립니다.
몽테뉴는 오해를 바로잡는 데 인생을 쓰지 않았습니다.
그는 세상의 시선을 설득하기보다 자신의 내면을 점검하는 쪽을 택했습니다.
그가 붙든 질문은 단 하나였습니다.
“나는 나에게 정직한가.”
오십의 삶은
모든 오해를 해결하는 삶이 아니라
오해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삶이어야 합니다.
누군가 나를 오해한다고 해서 내 판단이 달라지는가.
누군가 나를 낮게 평가한다고 해서 내 가치가 실제로 줄어드는가.
그렇지 않다면 설명은 선택일 뿐 의무가 아닙니다.
모두에게 이해받는 삶은
편안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만큼
자신을 끊임없이 편집해야 하는 삶이기도 합니다.
이해받지 못해도 괜찮다는 결심은
세상을 향한 냉소가 아니라
자기 존재에 대한 신뢰입니다.
나는 나에게 설명할 수 있으면 됩니다.
그 설명이 부끄럽지 않다면 그 하루는 이미 충분합니다.
[아리에르 부티크 : 나에게만 설명하는 시간]
해명의 충동을 하루만 늦춰보십시오
바로 반응하지 말고, “나는 무엇을 증명하려 하는가”를 적어보십시오.
그 답이 자존심인지, 두려움인지 분별해 보십시오.
하루를 스스로의 기준으로 마무리하십시오
타인의 이해를 기다리기보다 당신의 기준으로 하루를 돌아보십시오.
“나는 오늘 나에게 정직했는가.”
그 질문에 고개를 끄덕일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