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를 통해 어른이 되어간다
1985년, 오로지 덕순이만 바라보던 시아버지는 장손이 태어나도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대를 이을 아들이라 해도 눈꺼풀 한 번 깜빡이지 않던 분이었다.
반면 덕순이는 할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진숙이는 어쩌면 다행이라 생각했다. 아이가 수더분하고 주는 대로 밥도 잘 먹고, 김치도 일찍 배워 매운 줄 모르고 덥석덥석 먹었다. 김장날이면 제일 바쁘게 맛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작은 몸집에 암팡지기 그지없는 덕순이는 앞이 잘 안 보이는 할아버지를 대신해 지팡이를 들고 동네 어귀에 나가 동네 어르신들 말씀 한마디 거들곤 했다. 그렇게 아이가 애 어른이 되어 가는 줄도 모르고, 진숙이는 손 놓고 키웠다.
어느 날 누군가 덕순이에게 물었다. “너는 누굴 닮았니? 엄마? 아빠?” 그런데 덕순이의 대답은 묘했다. “저는 고모 닮았어요!” 덕순이에게 애정 어린 눈길을 주고, 아이를 봐준 건 아이 아빠도, 엄마인 진숙이도 아니었다.
진숙이는 하루 종일 아이와 붙어 있을 시간이 없었고, 아빠는 어떻게든 밥벌이를 위해 나가 있느라 부재했다. 덕순이는 할아버지와 함께 가끔 친정에 들러 좋아하는 과자와 인형을 사다 주는 제고모가 더 좋았나 보다.
진숙이의 하루는 벅차고 벅찼다. 돌봐야 할 중증 환자와 이제 갓난아이까지 돌보느라 악착같이 하루를 살아냈다. 돌 안 지난 아기를 업고 마당에 빨래를 널고 있을 때, 봄꽃향기에 취해 저도 모르게 “봄이구나” 하며 하늘을 올려다보는데 왜 그리 눈물이 흐르는지. 덕순이가 온 것도 눈치 못 채고 멈추지 않는 눈물만 연신 훔쳐냈다. 지어미가 우는 걸 아는지 아무 말 없이 덕순이는 엄마의 치맛자락을 만지작거렸다.
그날 밤, 진숙이는 조용히 짐을 싸서 그 집을 나왔다.
동네 어귀 모퉁이에 다다랐을 때, 동네 할머니와 마주쳤다. 진숙이는 깜짝 놀라 짐 보따리를 숨겼지만 소용없었다. 할머니는 진숙이를 쳐다보지도 않고 나지막이 말했다. “가, 괜찮어. 아무도 덕순이 엄마 욕 안 혀. 할 만큼 혔어 얼른 가. 나는 못 본겨.”
그 말에 진숙이는 그 자리에서 더 이상 나아갈 수 없었다. 풀썩 앉아 흐느꼈다. 더는 못하겠다는 마음에 도망쳐 나온 것이지만 그마저도 틀어져 버려 억울해서 우는 건지, 다른 사람들이 혀를 끌끌 차며 가엽게 여기는 본인의 삶보다 남겨진 애들의 삶이 더 불행해질까 무서웠던 건지. 소리죽려 온몸으로 울음을 토해내고 다시 무거운 발걸음으로 뒤돌아가야만 했다.
그 후로도 진숙이는 삶이 버거울 때마다 하늘을 보고 꾹 참아냈다. 그리고 그때마다 덕순이는 조용히 진숙이 옷자락을 꽉 부여잡고 엄마가 어디든 도망갈까 불안한 마음을 감추며 엄마를 붙잡아 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