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이 끝나자, 마치 파도의 때를 기다린 서퍼처럼 책을 집어들었다. 그동안 읽고 싶어 미뤄뒀던 고전소설들을 하나둘 모으다 보니, 어느새 책탑이 만들어져 있었다. 『콜레라 시대의 사랑』, 셰익스피어 전집, 『프랑켄슈타인』, 『드라큘라』, 『오페라의 유령』… 그렇게 나는 콜럼버스처럼 항해하는 배 위에서 고전 속 세계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프랑켄슈타인』을 읽다가 문득 떠오른 영화가 있었다. <가타카>. 유전자를 조작해 우성 인간을 만들어내는 미래 사회, 인간의 존엄을 침해하는 과학 세계를 그린 영화다. 유전자를 조작하는 과학자들의 모습은 빅터 프랑켄슈타인의 실험과 닮아 있다. 그는 인간을 조합해 괴물을 만들었다. 괴물은 지금의 좀비나 구울의 모습과 비슷했고, 자의로 움직이며 삶을 갈망했다. 그 괴물 또한 인간이었기에 자의를 가졌던 것 같다. 괴물이 통제를 벗어난 순간, 후회와 두려움을 느꼈으리라 생각한다.
두 작품은 같은 질문을 던진다. '과학은 어디까지 발전해도 괜찮은가?', '인간의 욕망이 자연의 섭리를 거슬러도 되는가?'
인간은 자연의 일부다. 그 자연을 넘어서려는 시도는 신이 되고자 하는 야망이 아니라, 어쩌면 세상을 파괴하겠다는 선언처럼 느껴진다.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인간이지만, 결국 우주 앞에선 먼지 한 톨이다. 신이라면 영원을 살아야 하는데, 인간은 그게 불가능하다. 신도를 만드는 건 가능하겠지만, 그럼에도 인간은 신이 될 수 없다. 우리는 자연이라는 환경 시스템에 존재하는 개체일 뿐이니까. 결국 인간은 인간인 것이다.
『오페라의 유령』은 어릴 적엔 단순히 유령이 무섭게만 느껴졌지만, 지금은 모든 캐릭터가 안타깝게 보인다. 에릭은 크리스틴을 통해 사랑과 예술, 구원을 모두 기대했을 것이다. 크리스틴은 그를 ‘음악의 천사’로 믿었고, (비록 거짓이었지만) 그 감정을 진심으로 받아들였을지도 모른다. 필립은 라울을 사랑했지만, 가족이라는 이름의 울타리를 넘지 못했다. 라울은 크리스틴을 진심으로 사랑한 걸까? 크리스틴의 말을 듣지 않고 마음대로 하려는 모습에서 오히려 가여운 크리스틴을 사랑하는 자신에게 빠진 나르시시스트 같았다. 필립의 사랑이 라울의 방패가 된 탓에 잘못을 바로잡을 기회를 앗아간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콜레라 시대의 사랑』은 이제 막 첫 장을 넘겼을 뿐인데도 결코 쉽지 않았다. 드라마에서 몇 번 접했지만, 활자로 마주하니 그 밀도와 깊이에 숨이 찼다. 조금씩, 천천히, 이 책과 사랑에 빠져야 할 것 같다.
셰익스피어 희곡을 읽을 땐 늘 넥슨 사의 게임인 <마비노기>가 떠오른다. 셰익스피어의 작품 세계를 퀘스트로 체험하는 장면 덕분에, 진지해야 할 대사에도 웃음이 나곤 한다. 가끔은 게임이 문학을 더 가깝게 만들어주는 매개가 되기도 한다는 걸 새삼 느낀다.
『드라큘라』는 잠시 보류 중이다. 대신 뮤지컬 넘버를 쭉 들으며 분위기를 상상 중이다. 뮤지컬도 보고 싶고, 진짜 드라큘라가 있다면 어떤 모습일지 상상해본다.
나에게 고전소설은 이해하기 어려운 이야기들이었고, 읽으라고 하니까 억지로 읽는 교과서 같은 존재였다.
지금은 고전소설이 음식과 같다고 생각한다. 읽는 이야기마다 맛이 다르고, 깊은 풍미가 느껴지며, 혀 끝을 톡 쏘듯 메세지를 던져준다. 그 맛을 음미하다 보면 어느새 그 책이 소화가 되어 있다. 그만큼 즐겁고, 어렵지 않아졌다.
그리고 또 하나, 『파우스트』. 뮤지컬로 먼저 알게 됐고, 전문가들조차 이해하기 어렵다 말하는 작품이다. 그래서 더 끌리고 있다. 괴테라는 사람은 어떤 생각을 품고 있었을까. 그의 사유가 담긴 『파우스트』를 하루빨리 펼쳐보고 싶다.
오랜만에 고전소설을 다시 읽기 시작했을 뿐인데, 그 끝이 보이지 않는다. 재미있는 책이 너무 많고, 그 안에 담긴 철학과 질문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깊고, 즐거웠다.
고전소설이 이토록 맛있고 풍요로운 것이었다니! 아직 깊이를 알 수 없는 미지의 세계이지만, 일렁이는 물에 발을 들이며 조금이나마 가늠하고 있다.
아마도 이건 낭만일 것이다. 굽이 치는 파도를 맞으며, 온몸으로 느끼고 있는 중인 것이다. 이 파도가 나를 덮쳐오는 순간, 나는 이 바다에 가라앉으며 헤어나오지 못하는 덕후가 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