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영화에 보면 여행을 가는 젊은 청춘들의 어깨 위에는 꼭 대형 라디오가 얹혀 있다. 우리 엄마 혼수품인 'Gold star 라디오' 역시 그시대 젊은 청춘들 어깨 위에나 얹힐법한 그런 라디오였다.
내가 중학생이 된 직후부터 대학생이 되어 집을 비울 때까지 우리 집 고물 라디오는 나의 차지였다. 내가 음악을 좋아해서라기 보다 그때의 나는 적막이 싫었다. 내 주변의 고요함을 견디지 못했다.
마이마이, 워크맨, CD플레이어 같은 소형가전이 등장하던 시기에 'Gold star 라디오'는모든 장치가 수동인, 투박하기만 한, 이미 한물간 고물이었지만 마이마이도 워크맨도 CD플레이어도 없던 나에게는 그것들과 다를 바 없는 물건이었다.
고물 라디오가 가져다주는 가장 강렬한 기억은 김기덕 아저씨가 진행하던 '골든 디스크' 방송이다. 매일 오전 11시에서 정오까지 팝송만 틀어주던 방송이었다. 컨트리 음악, 재즈 음악, 보사노바 음악, 퓨전 음악, 또 부에나 비스타 소셜클럽, 리사 오노 등등 많은 팝 음악과 외국 가수들을 알게 되고 좋아하게 되었다. 지금 내가 알고 있는 팝 음악에 대한 상식은 김기덕 아저씨 덕분이다. 그 당시 김기덕 아저씨가 알려주는 외국 가수와 팝 음악 들을 작은 노트 한 권에 옮겨 적어놓았었는데 지금은 그 노트도 사라졌다.
고물 라디오가 가져다주는 또 하나의 기억은 HOT와 SES와 지누션 그리고 친구가 선물해준 녹음테이프이다. 그 당시 인기 있었던, 내가 좋아했던 가수들의 앨범 테이프를 들을 수 있는 유일한 가전이 그 라디오였다. 지금도 앨범 테이프들은 소장을 하고 있지만 그 당시 너무 열심히 들었던 여파로 테이프들은 늘어질 대로 늘어져있다.
결국 고물 라디오가 가져다주는 기억은 어렸을 때의 나다. 아무도 없는 빈 집에서 적막함이 싫어 라디오를 들으며 혼자 시간을 보내던 내 모습. 좋아하는 가수의 노래를 마음껏 들으며 열정적으로 좋아했던 내 모습.
그러니까,
그 시절 내가 좋아했던 시간-
그 시절 내가 좋아했던 공간-
그 시절 내가 좋아했던 분위기-
그때의 그것들에 대한 그리움이 고물 라디오에 묻어 고스란히 지금 나에게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