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책이 친해지기 시작하던 초창기에 이병률 작가의 책 '끌림'을 접하게 되었다. 읽고 싶은 책 리스트에 올려놓았던 책인데 아는 언니가 가지고 있어서 빌려 읽었던 기억이 난다. 시인지 에세이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던 '끌림'은 '2000년, 밀레니엄, 21세기'같은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수식어만큼이나 새롭게 다가왔다.
사랑을 하면 마음이 엉키죠. 하지만 그대로 놔두면 돼요. 마음이 엉키면 그게 바로 사랑이죠.
(끌림 #009 탱고)
무엇 때문에 난 사랑하지 못하는가, 하고 생각하지 마라.
그건 당신이 사랑은 '누구나, 언제나 하는 흔한 것' 가운데 하나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왜 나는 잘하는 것 하나 없으면서 사랑조차 못하는가 하고 자신을 못 마땅해하지 마라.
그건 당신이 사랑을 의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랑은 흔한 것도 의무도 아닌 바로 당신 자신이다.
사랑해라. 그렇지 않으면 지금까지 잃어 온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잃게 될 것이다.
사랑하고 있을 때만 당신은 비로소 당신이며 아름다운 사람이다.
(끌림 #018 사랑해라 중 일부)
'끌림'의 첫인상은 글이 참 신세대(?)스럽다는 것이었다. 이병률 작가는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이 되어 작가의 세계로 등단을 한 시인이었다. 그래서인지 '끌림'은 시와 에세이의 경계선 상에 있는 듯했고, 그의 글은 새로운 밀레니엄 시대를 닮아 있는 듯했다. 요즘 말로 '트렌디'한 글 말이다. 나는 그 책이 좋았다.
이후 나는 그의 책을 사서 모으듯 읽기 시작했다.
끌림(여행 에세이)
당신은 어딘가로 가려한다(시집)
눈사람 여관(시집)
내 옆에 있는 사람(여행 에세이)
혼자가 혼자에게(에세이)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여행 에세이)
이별이 오늘 만나자고 한다(시집)
일상에 숨이 막혀 한창 힘든 시기가 없지 않았을 때 도피처처럼 여행서적을 열심히 찾아 읽었다. 그래서 여행 에세이를 선호하던 시절 이병률 작가의 책은 종종 내 손 위에 있었다. 일반적인 여행지를 소개하는 많은 여행서적들 사이에서 '여행 에세이'라고 불리는 그의 책들은 달랐다.
만약에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거든
많이 먹지 말고 속을 조금 비워두라
잠깐의 창백한 시간을 두라
혼자 있고 싶었던 때가 있었음을 분명히 기억하라
어쩌면 그 사람이 누군가를 마음에 둘 수도 있음을
그리고 둘 가운데 한 사람이
사랑의 이사를 떠나가 수도 있음을 염두에 두라
다 말하지 말고 비밀 하나쯤은 남겨 간직하라
그가 없는 빈집 앞을 서성거려보라
우리의 만남을 생의 몇 번 안 되는 짧은 면회라고 생각하라
그 사람으로 채워진 행복을
다시 그 사람을 행복하게 함으로써 되갚으라
외로움은 무게지만 사랑은 부피라는 진실 앞에서 실험을 완성하라
이 사람이 아니면 죽을지도 모른다는 예감과 함께 맡아지는
운명의 냄새를 모른 체하지 마라
함께 마시는 커피와 함께 먹는 케이크가
이 사람과 함께가 아니라면 이런 맛이 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라
만날 때마다 선물 상자를 열 듯 그 사람을 만나라
만약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거든
('내 옆에 있는 사람' 중에서)
언젠가 이병률 작가의 필모그래피를 찾아본 적이 있다. '이소라의 FM 음악도시'라는 라디오 프로그램 작가를 시작으로 1995년 신춘문예 시 부문 당선으로 등단을 했다고 한다. '이소라의 FM 음악도시'는 내가 잘 들었던 라디오 프로그램이었다. 늦은 밤 라디오에서 디제이가 읽어주던 주옥같던 오프닝 멘트들도 그가 썼다는 생각을 하니 더 가깝게 느껴지기도 했다. 생각을 해보면 라디오 작가라는 필모그래피 덕분에 그의 글이 조금은 더 시대의 흐름을 따라가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한 사람을 만나는데 삼십 년이 걸린다 치면
한 사람을 잊는데 삼십 년이 걸린다고 치면
컴컴한 얼룩 하나 만들고 지우는 일이 한 생의 일이 터.
나머지 절반에 죽을 것처럼 도착하더라도
있는 힘을 다해 지지는 마오.
(당신은 어디로 가려한다 '생의 절반' 중 일부)
이병률 작가의 글을 읽다 보면 대중적인 글, 소통이 되고 공감이 되는 글은 이렇게 써야 하는구나 싶은 생각이 들 때가 많다. 그의 오래전 책을 읽어보아도 클래식함이 느껴지지 않는다. 트렌디한 글이란 이런 것이다라고 자랑하는 듯 한 그의 글을 읽으면서 재능이라면 참으로 부럽고 노력이라면 나는 한참 게으르다는 생각에 사로잡힌다.
출판사를 운영하면서 여전히도 여행을 하고 사진을 찍고, 자신만의 글을 쓰고 있을 거라 짐작해 본다. 이 모든 자신의 재능을 활용하여 그는 책을 만든다. 그의 시든 그의 에세이든 글에 대한 신뢰를 주는 작가라는 이미지가 나에게 남았다. 독자에게 신뢰를 심어주는 글은 그 자체로 재능이 아닌가 싶다.
짐만 가지고 떠남은 떠남이 아니다. 최소한의 감정의 재료를 함께 가져간다면 그 어느 곳에도 새로운 인생의 조각들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