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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사의 시 Apr 25. 2024

오늘, 런던

맥주가 사라졌다

새벽에 잠에서 깨어 뜬 눈으로 런던의 아침을 맞이 하고 보니, 두통이 일었다. 억지로라도, 조금이라도 잠을 청해본다.


전날 TESCO에서 사다 놓은 음식들로 아침을 먹으려는데, 글쎄 숙소 공용 냉장고에 넣어두었던 나의 맥주가 1캔을 남기고 모두 사라졌다. 4캔 1묶음을 사서 전날 저녁에 1캔을 마셨으니 3캔이 남아있어야 하는데 1캔 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분명 나의 방으로 표시된 위치에 정확하게 맥주를 넣어두었는데 양심없이 누군가가 마셔버린것이다. 범인은 같은 숙소에 묵고 있는 옆방 여자이거나, 아랫방 남자다. 누구일까?


아침마다 시끄러운 옆방 여자가 범인일까? 공용 부엌에서 마주치고 인사만 한번 했을 뿐인 그 정도의 사이인데다 나보다 이 숙소에 더 오래 머물고 있어서 냉장고 사용법을 모르지 않을텐데. 그렇다면 있는 듯 없는 듯 한 아랫층 남자일까? 그저 현관문 앞에서 마주쳐 인사 한번 했을 뿐인 그정도의 사이인데.


'내 맥주 돌려달라' 말 할 용기는 없지만 누가 마셨는지는 궁금하다. 사실 맥주를 1캔만 구입할 작정이었는데 TESCO 마트에 낱개로 판매되는 맥주들이 딱 마음에 드는 종류가 없어서 PERONI 4캔 1묶음을 구매한거여서 맥주가 없어졌다고 그다지 기분이 나쁠 일도 없었다. 내가 다 못 먹어서 남기는 것 보다야 누군가 먹어준다면 다행인거니까. 그럼에도 나의 맥주를 누가 마셨을까 궁금증이 대폭발이다.

 

하루 종일 범인은 찾지 못했고, 남아있는 맥주 1캔은 방으로 가져왔다. 공용 냉장고에는 이제 아무것도 넣지 않을 작정이다.





정오가 되어서 코번트 가든으로 향한다. 아기자기한 상설 마켓들이 즐비하고, 다양한 길거리 공연들이 펼쳐지는 곳이다. 그곳은 오래전의 그때와 크게 달라진 것은 없어보였다.


런던에 온 목적을 달성하고 보니 다음에는 무엇을 해야할지 모르겠다. 그래서 정처없이 걸었다. 오래전에 걸었던 그 길들을 기억하면서.



'코번트 가든 - 피카딜리 서커스 - 리젠트 스트리트 - 옥스퍼드 서커스 - 토튼햄 코트 로드 - 레스터 스퀘어'로 이어지는 거리를 지도도 없이 걸었다. 걷다보니 기억이 난 건데, 10년전 보다 깔끔하고 화려하고 거대해진 느낌이었다.


오래전 그때의 브랜드들은 많이 사라져있었고 거리 위의 숍들은 대부분 대형화가 되어 있었다. 거대하고 위대한 나이키 매장에 압도당하고 말았다.


Leicester Square(레스터 스퀘어) 언더그라운드 역과 Tottenham Court Road(토트넘 코트 로드) 언더그라운드 역 사이에는 한국음식점(BUNSIC), 한국 식료품점(Seoul Plaza), 한국 물품을 판매하는 슈퍼마켓(Oseyo Soho), 한국 뷰티숍(Pureseoul soho/Nature Republic UK) 등이 생겨나 있었고, Oxford Circus(옥스포드 서커스) 언더그라운드 역과 Tottenham Court Road(토트넘 코트 로드) 언더그라운드 역 사이에는 삼성 매장도 위치하고 있었다.


걸으면서 한국의 흔적을 찾는 재미도 있었다. 한국과 관련된 숍들이 상당히 많았고, 무엇보다 숍을 이용하는 고객들이 많았다. 오래전 그때는 한국 식료품점 찾는 것도 쉽지 않았는데 지금은 한국의 흔적들이 많아서 '한류'의 분위기를 실감하게 되었다.



숙소 근처에 오랜 한국 음식점이 있다고 해서 찾아갔다. '온 더 밥'이라는 한식당이었다.


오후 3시. 늦은 점심을 먹는 사람이 나 뿐만은 아니구나, 안도하며 순두부찌개를 주문한다. 솔직히 타국에서 먹는 한식을 신뢰하는 편은 아니다보니 기대는 하지 않았는데 너무 한국의 맛이 느껴져서 맛있게 다 비워냈다.


'순두부찌개+밥1공기+김치+김+생수+맥주1병' 주문하니 32.34파운드(한화 55,000원)이다. 런던에서 식당 밥 먹기가 이렇게나 위험하다. 한국에서는 겨우 10,000원정도인 순두부찌개인데 말이다.



피곤이 밀려온다.




나의 맥주를 마시고 누군가의 하루가 조금이라도 위안이 되었다면 그 이유만으로도 내가 맥주를 4캔씩이나 구매한 가치는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피곤한 하루의 마지막을 맥주 1캔으로 위안을 받는 사람들에게는 가망없는 일확천금보다도 실현 가능한 맥주 1캔이 더 귀하게 여겨지기도 하니까 말이다.


나는 그저 나의 맥주로 하루의 위안을 얻은 그 누군가가 누구인지 궁금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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