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밖의, 런던

뜻밖의 번뇌

by 천사의 시

'어차피 지금 당장은 목적지도 없는데 좀 헤맨다고 큰일이 나지는 않아. 도망, 방황이 여행이어도 까짓 뭐가 문제야. 그로 인해 아픈 마음이 치유가 된다면야.'


눈앞에 보이는 것들이 다시 예뻐 보이기 시작했다. 나무 한 그루, 구름 한 점, 고풍스러운 건물들 까지.





거리를 걸으면서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알지 못하는, 여행자의 눈에는 예쁘기만 한 거리의 풍경을 사진으로 남기고 있었다. 한껏 물이 오른 자신감 덕분에 자존감도 살아나고 있던 그때였다.


남자 : 중국사람? 일본사람?

여자 : 나 한국인이야.

남자 : (한국어) 안녕!

여자 : 어!! (한국어) 안녕하세요.

남자 : 한국 좋아한다. 서울을 안다.(?) 블라블라~ 여행 중이야?

여자 : 응. 그냥 여행 중이야.

남자 : 얼마동안 여행해? 한국으로 언제 돌아가?

여자 : 한 달 정도. 그렇지만 런던은 내일 떠나.

남자 : 한국으로 돌아가는 거야?

여자 : 아니. 포르투갈로 갈 거야.

남자 : 너 너무 예뻐! 너의 인스타 그램 알려줄래?

여자 : 난 인스타 그램을 하지 않아.

남자 : 그럼 전화번호를 알려줄래?

여자 :?!...... 미안.

남자 :......


순간 많은 상황들이 나의 머릿속을 스쳤다. 그리고 또 많은 상상들이 순식간에 나의 머릿속을 지나쳤다.


이러한 즉흥적인 만남을 좋아하지도 않을뿐더러 전화번호를 알려준다고 해도 영어를 하지 못하는 내가 어떤 말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저런 말을 하는 저 사람의 의도는 도대체 무엇일까, 또 상당히 불편한 관계만 하나 더 만들어 내는 것 아닐까 하는 불안 등등 짧은 순간에 참 많은 번뇌가 들었던 것도 사실이다. 모두 부정적인 번뇌였지만.


넘어서면 상당히 불편한 건 분명한데 내가 알지 못하는 또 다른 새로운 세계가 열릴 수도 있는 선이 존재한다. 선을 넘을 것인가, 말 것인가를 판단하는 기준이 분명 있겠지만 그건 상당히 주관적이어서 누군가 대신해 줄 수 없는 선택임에는 확실하다. 그동안의 나의 경험치, 나의 생활방식, 나의 생각 같은 것들을 총 동원할 수 밖에는 없다. 그래야지만 앞으로 벌어질 모든 상황들에 대하여 오롯이 내가 책임을 질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상황이 당황스럽고 남자와 여자라는 관계 형성에 서툴기 때문에 또다시 마음의 벽을 쳐버린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한 순간, 살아나고 있던 자존감이 가라앉고 한껏 물이 오른 줄 알았던 자신감도 더 이상은 하늘을 날지 못하였다.


이게 뭐라고 이렇게나 깊은 번뇌에 빠지는가 싶지만,

삶에서 쓸모없고 불필요한 마음의 벽이 존재하고 그 벽을 부숴야 한다는 것을 오래전부터 알면서도 그러지 못하는 스스로가 안타깝기도 하고, 지금까지의 나의 경험치가 이것밖에 되지 않는가 싶어 실망스럽기도 하고.

뭐, 그러한 생각들이 복합적으로 나타나는 바람에 이러한 번뇌에 빠진 것 같다.(사실 이런 상황에서 흔쾌히 연락처를 주고받고, 만나는 그런 일련의 과정이 아주 용감하고 멋지다고 생각하는 걸지도. 그래서 그걸 하지 못하는 스스로가 주눅이 드는 걸지도.)


나의 거절과 그의 뒷모습이 자꾸만 눈에 삼삼하다. 이게 뭐라고......






숙소가 있는 Old Street 언더그라운드 역에서 Oxford Circus 언더그라운드 역까지 도보로 한 시간 정도 걸린다는 걸 오늘 걸으면서 알았다. 신기하게도 거리 곳곳에 한국 음식점이 있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런던에 한식당이 많다는 사실이 놀랍다. 분명 10년 전에는 한식이 그리워도 마땅히 갈 만한 식당이 없었던 거 같은데.



Boots(부츠), Marks&Spencer(막스&스팬서), Primark(프라이막), H&M(에이치앤엠) 등등 많은 상점들이 줄지어 서 있는 거리에서 런던 방문 기념 선물을 산다. 영국에서 구입하면 좋은 것 중에는 화장품이 항상 1위로 꼽힌다. 대한민국에도 있는 브랜드들이긴 하지만 현지에서는 좀 더 저렴하게 구입을 할 수 있다 보니 화장품을 많이들 구입을 한다고 한다. 10년 전에도 e45 크림을 선물용으로 왕창 구입했었는데, 이번엔 Boots에서 NO.7 아이크림을 사 본다.


그 후 한국 식료품점에 잠시 들러 영국 대형 슈퍼마켓에는 없는 한국식 컵라면을 하나 산다. 그리고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TESCO 마트에 들러서 샌드위치와 오렌지 주스를 산다. 환전해 온 파운드 현금을 쓰기 위한 나의 노력이다. 그럼에도 아직 20파운드 이상 남았다.



예쁜 런던 거리를 3시간 동안 걸으며 생각했다.


런던은 나의 마음속에 품기에 너무 넓은 도시이다. 혼자서 여행을 하기에는 참으로 쓸쓸한 도시라는 걸 확실하게 실감하는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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