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두망 Jan 19. 2022

04. 친구와의 전화가 특별해질 때

부산광역시

이 이야기는 본인이 2018.09.27~2018.11.02까지 직접 다녀온 전국 배낭여행을 기억하며 쓴 국내 여행 에세이입니다. 제 이야기를 통해 많은 분들이 참고 있는 여행의 갈증을 조금이라도 해소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챕터4

#4 친구와의 전화가 특별해질 때




오늘 머무를 <다섯 그루 나무>는 여행 중 유일하게 떠나기 전부터 미리 예약한 곳이자 이틀을 묵은 숙소이다. 이곳은 ‘한국건축가협회상’과 ‘부산다운건축상 금상’을 수상한 건축물로써 다닥다닥 붙어있는 협소 주택들 사이에 튀는 듯 튀지 않게 5개의 건물이 모두 높낮이가 다르게, 심지어 재료마저 죄다 다른 모습으로 그 자리에 서 있다. 사람의 시선으로 건물을 보면 주변과 별 다른 점이 없어 보이지만 드론으로 찍은 공중에서의 사진을 보면 이렇게 튀는 건물이었어?라는 생각이 저절로 들게 된다. 이 신비함에 매료되어 직접 공간을 느껴보고 싶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예약한 <다섯 그루 나무>는 내가 여행을 더 이상 늦추지 못하고 과감하게 출발할 수 있게 도와준 계기가 되기도 했다.


아침에 일어나 조식을 먹으러 가다가 주방에 사람이 꽤 많이 몰려 있는 것을 보니 왠지 피곤해져서 다시 침대로 돌아왔다. 배도 별로 고프지 않고 같은 곳에서 하루를 더 묵는지라 짐도 놔두고 가볍게 돌아다닐 수 있는데 조금 일찍 나서볼까 하는 생각이 들어 주변에 맛집을 검색하다 유명한 <초량 불백 거리>가 바로 앞에 있다는 것을 찾아내고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겼다. 다행히 이른 시간이라 손님이 없어서 당당하게 식당에 들어가 불백 1인분을 주문했다. 다양한 밑반찬들과 함께 나온 불맛이 가득 담긴 불백은 맛집으로 소개될 만큼 맛있었다. 고기 한 점 남기지 않고 깨끗하게 비운 뒤 서서히 몰려 들어오는 손님들을 피해 얼른 자리를 비웠다.



부산 초량에 위치한 <정란각>



기분 좋은 아침을 먹고 난 뒤 걸어서 방문할 수 있는 <정란각>에 도착했다. 1943년에 지어진 고급 일본식 주택인 정란각은 현재 카페로 사용되고 있으며 아이유의 노래 ‘밤편지’ 뮤직비디오 촬영지로도 유명해서 많은 방문객들이 찾아오는 곳이다. 내가 찾아간 날은 다행히(?) 비가 와서 일요일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많지 않았다. 혼자 여행을 하다 보면 이런 멋진 곳에서 스스로의 모습을 사진으로 남기기 힘들다는 사실이 참 아쉽다. 예쁘게 옷을 차려입고 서로의 사진을 찍어주며 웃는 친구, 연인들의 모습이 참 부러웠다. 여기까지 온 이상 그냥 가기는 아쉬워 일본식 다다미가 깔린 자리에 앉아 시원한 매실차를 주문했다. 아직은 며칠 안 되는 여행 기록들을 정리하고 다음 일정들을 계획하다가 창밖의 빗소리를 들으며 한동안 멍하니 앉아 있는다.


아무 생각이 없다는 것. 보통 부정적으로 많이 쓰이는 이 말은 굉장히 한심한 말이라고 생각했다. 사람이 생각을 안 한다는 것은 발전하기를 멈춘다는 것이고, 결국은 도태되고 말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여행 중 의외로 생각을 멈추고 가만히 멈춰 서서 그저 바라보고 있는 그대로를 느끼는 경험들이 많았고 그때 나는 깨달았다. 아무 생각이 없다는 것은 지금, 이 순간 고민과 갈등, 이익과 손해 따위를 전혀 계산하지 않고 그 순간 눈에 보이는 그대로를 느끼며 스스로에게 솔직해지는 것이라는 것을.



매실차와 함께 한 '아무 생각이 없었던 순간'



정란각에서 나와 버스를 타고 달려간 부산 남구는 우리의 아픈 역사와 자랑스러운 역사, 선조들의 고귀한 희생들이 모여 있는 곳이었다. 오늘 방문하기로 한 <국립 일제 강제 동원 역사관>, <유엔 평화기념관>, <유엔 기념공원>이 그랬다. 선조들의 피,땀,눈물로 이루어 놓은 역사들을 보며 전쟁이 없는 시대에 태어난 것에 대한 감사함과 역경의 시대를 이겨낸 선조들에 대한 존경스러움이 밀려왔다. 방문한 건물들은 각자의 전시와 용도에 맞게 잘 설계되어 있었다. 자연스럽게 동선에 이끌리듯 전시를 구경하며 가슴속으로 몇 번이고 ‘감사합니다. 죄송합니다.’를 외쳤다.



(좌) 국립일제강제동원역사관 / (우) UN기념공원



한참을 돌아다녀 기진맥진해진 나는 하루를 끝내기 전 잠시 고민에 빠지게 되었다. 부산에서의 마지막 날인데 수영구에 위치한 수변공원에 들러 야경을 보고 들어갈 것인가, 피곤한데 그냥 숙소에 가서 쉴 것인가. 두 가지 선택지를 두고 고민하다가 아직은 버틸만하다고 판단하여 (여행 첫날에는 저녁에 맥주도 한 잔 못 마실 정도로 피곤했다.) 전자를 선택하고는 수변공원으로 가는 지하철에 몸을 실었다.


홀로 도착한 수변공원에는 이미 자리를 펴고 앉아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예상은 했지만 많은 공동체 속에서 혼자 있는 것은 조금 외로운 경험이었다. 하지만 이 풍경에서 오래 머물고 싶었기에 남들 다 하는 캔맥주와 닭강정을 하나 사서 당당하게 맥주 캔을 뜯었다. 바닷가 특유의 찬 바람에 닭강정이 금방 식어서 아쉬웠지만 바다를 보며 맥주와 함께 먹으니 그 맛이 또 다르다.



수변공원에서 가볍게 캔맥주 한 잔



가족, 친구 또는 연인들과 함께 웃으며 여유를 즐기고 있는 사람들을 보니 문득 사람이 그리워졌다. 아빠에게 문자를 보내고, 엄마에게 전화를 걸고, 친구 한빈이에게 영상통화를 걸어서 노을이 지고 있는 수변공원의 풍경과 함께 들고 있는 캔맥주와 닭강정을 보여주었다. 졸업 전시를 앞두고 피곤해 보이는 한빈이는 본인도 정신이 없으면서 내 이야기를 한참을 들어주었다. 정신없이 전화기를 들고 큰소리로 웃고 떠들다가 전화를 끊으니 순간 고요해졌다. 조금 전까지 신나서 떠들던 내 목소리가 환청이었던 것처럼 사라지고 주변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다시 귀에 들려온다. 잠깐 꿈을 꾼 느낌이다. 혼자 여행을 하다 보니 친구와 하는 전화가 특별한 일이 돼버린다. 늘 해왔던 친구와의 전화가 특별한 일이 되고, 특별하다고 생각했던 여행이 일상이 되어가는 과정. 일상과 비일상이 서로 치환이 되는 설렘 혹은 두려움. 다들 이래서 여행을 갔다가 그렇게 고생을 하고도 또다시 떠나고 싶어 하는구나.



우리가 지켜야 할 풍경



조금 걷고 싶어져서 엉덩이를 털고 일어나는데 바닷가 근처에서 아이들이 꺄르륵거리며 뛰어노는 모습이 보였다. 바다와 아이들과 노을이 공존하는 모습이 지난날 선조들이 우리를 지켜주셨듯 현재 우리가 소중하게 지켜 내야 할 모습 같아 나도 모르게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찰칵! 




 전국 30개의 도시, 100여개의 공간을 다녀왔습니다.

국내배낭여행을 계획하시는 분들에게 영감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원고 제의 및 협업 요청은 언제라도 환영입니다.


작가 본계정 인스타 (@smg_dm)

쪼렙여행자 인스타 (@jjolevel_traveler)


매거진의 이전글 03. 오랜만에 만나도 변함없다는 것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