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양산
이 이야기는 본인이 2018.09.27~2018.11.02까지 직접 다녀온 전국 배낭여행을 기억하며 쓴 국내 여행 에세이입니다. 제 이야기를 통해 많은 분들이 참고 있는 여행의 갈증을 조금이라도 해소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드디어 부산을 떠나 양산으로 간다. 부산은 틈틈이 친구를 만나러, 일이 있어서 자주 방문한 곳이라 낯익은 곳이었다면 이제부터는 정말 낯선 곳으로 떠나게 된다. 아직 경상도도 못 벗어났지만 내 마음은 이미 말도 통하지 않는 곳에 떨어진 여행자가 가질 법한 설렘으로 가득하다. 여행 출발 전 양산이 고향인 후배에게 양산에서 갈만한 곳이 어디 있는지 물어봤다. “오빠 양산 진짜 볼 거 없어. 거기를 뭐하러 가는 거야?” 냉정한 후배의 대답이 돌아왔다.
양산은 내가 여행 목표로 세웠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7개의 사찰 방문하기]의 첫 번째 사찰인 <통도사>가 있는 곳이다. 계획을 세울 때는 몰랐다. 양산 통도사, 영주 부석사, 순천 선암사 등 지역 이름이 붙어있지만, 실제 사찰은 도심에서 훨씬 벗어난 곳에 있다는 사실을. 매번 아빠가 운전하는 차만 타고 다녔으니 사찰이 어디에 있는지 알 턱이 있나... 다시 한번 내가 여행 신생아(?)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다.
양산까지 와서 통도사만 방문하기엔 너무 아쉽다고 생각한 나는 양산 도심에서 볼만한 건축물을 하나 찾아 그곳에서 아는 동생인 태훈이를 만나기로 했다. 태훈이는 경남지역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경남건축학생연합 ‘가온’을 이끌고 있는 회장이다. 첫 만남부터 지금까지 온라인에서 알고 지낸 우리는 처음으로 오프라인에서 만나게 되었다. 늘 온라인상에서 이야기하다가 실제로 얼굴을 마주한 느낌이 또 다르다. 서로 반갑게 인사를 한 후에 자리에 앉자마자 태훈이가 갑자기 질문을 던졌다.
“형님, 그런데 초량에서 오셨으면서 왜 버스로 오셨어요?”
“지도에 그렇게 찍히던데? 다른 방법이 있어?”
“초량 앞에 있는 부산역에서 지하철 타셨으면 훨씬 빠르셨을 텐데요?”
그렇다. 나는 교통편을 알아볼 생각도 하지 않고 네이버 지도에서 알려주는 대로 무려 세 번을 환승해가며 부산과 양산 시내를 돌고 돌아 도착했던 것이다... 이다음부터 나는 목적지가 정해지면 목적지에 도착하는 다른 방법이 있는지를 철저하게 조사했다. 이 날 나는 확실하게 배웠다. 내가 가고자 하는 목적지의 길은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며, 내가 아는 수단은 정답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그리고 이 사실은 꼭 여행자에게만 적용되는 문제는 아니었다.
큰 깨달음을 얻은 나는 다시 커피를 마시며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이야기의 주제는 자연스레 나의 여행 계획으로 흘러갔고, 오늘 오후에 통도사에 방문할 예정이라는 얘기를 하자 갑자기 태훈이의 표정에 의아함이 번졌다.
“형님, 오늘 통도사에 가실 거면 지금 일어나셔야겠는데요?”
“아직 11시 밖에 안 됐는데?”
“여기서 통도사 가는 버스가 몇 대 없을걸요? 확인해보세요.”
아까의 두 배쯤 되는 충격이 다가와 내 뒤통수를 때렸다. 그냥 아침부터 서둘러 통도사를 향해 달렸으면 되었을 것을, 나는 바보같이 절이 24시간 열려있고, 워낙 유명한 <통도사>이기에 절로 가는 버스가 얼마든지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스스로 굉장히 꼼꼼하고 계획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어쩜 이다지도 허술할 수 있는지... 지금 생각해도 얼굴이 새빨개진다. 너무 부끄러워서 이 이야기는 뺄지 말지 굉장히 망설였다. 부디 이 글을 읽고 있는 여러분만 알고 있기를 바란다.
이야기를 듣고 버스 시간표를 확인하자마자 너무 당황한 나는 태훈이와 제대로 된 인사도 하지 못하고 허겁지겁 버스 정류장으로 달려갔다. 다급하게 도착한 정류장에는 틀림없이 통도사로 가는 버스가 정차한다고 적혀 있었지만 하필이면 정류장 안내판이 고장 나있었다. 머피의 법칙은 꼭 이럴 때 나타난다. 그렇게 무작정 기약 없는 기다림이 시작되었다. 그렇게 30분... 1시간... 1시간 30분까지 기다리다 결국 오늘 통도사에 가는 것을 포기하고 만다.
이렇게까지 일정이 크게 틀어진 적이 없었던 나는 굉장히 당황했지만, 아직 너무 이른 시간이기에 이대로 양산에서 하루를 마치기에는 남은 시간이 너무 아까워 그 자리에서 플랜 B를 세우기로 했다. 한참 궁리하다 결국 통도사에 가장 가깝게 갈 수 있는 통도사신평버스터미널로 가서 하루를 마무리하기로 했다. 인터넷으로 알아보니 다행히 1시간 이내로 버스가 있었고, 나는 부지런히 시외버스터미널로 이동했다.
“네? 뭐라고요?”
“오늘 통도사로 가는 버스는 7시에 있는 막차 밖에 없습니다.”
“아니 인터넷에는 2시에 버스가 있다고 되어 있던데요?”
직원은 대답 대신 조용히 무언가를 가리켰고, 직원의 손가락 끝에는 ‘인터넷에 기재된 시간표 및 요금표가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 착오 없으시길 바랍니다.’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아니, 그걸 인터넷도 아니고 여기에 적어놓으면 무슨 소용이 있냐고 한마디 하고 싶었지만 어디 그게 직원 잘못이겠는가... 다행히 시간 많고 여유로운 내가 웃으며 넘어가야지.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폭풍 같았던 사건들이 지나가고 나니 그제야 배가 고파오며 여태껏 식사도 못하고 뛰어다녔다는 사실이 생각났다. 일단 밥부터 먹고 주변을 둘러보자는 생각으로 근처의 식당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역시 스트레스를 받을 때는 맛있는 걸 양껏 먹는 게 제일이다. 혼자 국숫집에 들어가서 비빔국수와 왕만두까지 먹어 치우고 나니 여유가 조금 생겼다. 하긴, 지금부터 버스 탈 시간은 4시간이나 남았으니 여유가 있을 수밖에 없다. 시간은 있지만 카페에 가서 앉아 있자니 볼 책이 없고 주변을 돌아다니자니 피곤하다. 고민을 하고 있던 도중에 갑자기 머릿속에 시간을 때울 수 있는 좋은 장소가 한 군데 스쳐 지나간다.
휴대폰 검색을 통해 가장 가까이 있는 PC방에 들어갔다. 개인 컴퓨터를 산 이후에 좀처럼 가본 적이 없는 곳이다. 게임을 끊은 지는 좀 됐지만, 시간을 때우고자 예전 기억을 되살려 게임을 몇 판 했다. 오랜만에 해서 그런지 손에 익지 않는 게임을 몇 판 끝내고 내가 지금 여기서 왜 이러고 있나 생각이 들 때쯤 오늘 하루 유난히 재수가 없었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친다. 이런 날은 긴장을 풀면 꼭 다른 변수가 생기기 마련이라는 것을 수많은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다. 아까 표를 사면서 보았던 ‘선착순 승차’라는 문구가 마음에 걸린다. 한 번 터지기 시작한 불안은 멈출 줄을 모르고 결국 1시간 일찍 버스 정류장에 도착해서 가만히 앉아 있지도 못하고 버스가 오는 승차장 앞에 서서 한참을 서성거리며 버스를 기다렸다.
7시에 도착한다던 버스는 7시 10분이 넘었는데도 도착하지 않았고 걱정을 넘어서 불안해지기 시작한 나는 발만 동동 굴렀다. 잠시 자리를 비우지도 못하고 계속해서 승차장 입구만 바라보고 있던 나는 15분 늦게 도착한 버스에 올라타고 나서야 겨우 마음을 놓았다. 자리에 앉아서 버스에 승객이 반도 타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하니 ‘선착순 승차’라는 문구가 얼마나 가벼운 경고였는지 생각하며 피식 웃었다. 이어폰을 끼고 좋아하는 노래를 틀고 창밖을 바라보며 오늘이 얼마나 정신없는 하루였는지 되돌아봤다. 일이 정말 꼬일 만큼 꼬였지만 포기하지 않고 결국 목적지로 향하는 스스로가 자랑스러웠다. 한참을 잡생각을 빠져 있다 무심코 시계를 봤다. 길이 막히는지 도착 예정시간이 지났음에도 버스는 계속 움직이고 있었다. 정말 이 놈의 버스 시간표는 맞는 것을 본 적이 없다고 구시렁대며 지도를 보는데.... @&^#%&!$#%??? 버스가 신평버스터미널을 한참 지나 위로 올라가고 있었다. 나는 이 순간의 감정을 글로는 도저히 표현하지 못하겠다. 나에게 만약 더 놀랄 기운이 남아 있었다면 아마 크게 비명을 질렀을 것이다.
냉정하게 생각해보자. 그래, 나는 지금 버스를 잘못 탔다. 지금 있는 위치를 보아하니 아무래도 경주로 가는 듯하다.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만약 서울로 가는 버스였다면 전부 포기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 내게 포기를 하고 말고 할 여유는 없었다. 냉정하게 생각해보니 내가 내릴 수 있는 선택지는 몇 가지 없었다. 우선 첫번째, 그냥 <통도사>를 건너뛰고 경주를 목적지로 재설정하는 것. 그러나 나에게는 <통도사>에 꼭 가야 하는 이유가 있었고, 다음날 울산에서 후배와 만나기로 한 약속도 있었다. 잠시 고민을 했지만, 결론은 한가지였다. 최대한 신평버스터미널 가까이로 다시 돌아간다. 정신을 차리고 버스를 검색해보니 경주에서 언양으로 간 후 거기서 신평버스터미널로 가는 방법이 있었다. 다행히 버스 시간도 맞아떨어질 것 같았다. 정신 차리자.
경주에서 내리자마자 다시 매표소로 달려가서 언양으로 가는 표를 끊고 버스를 향해 달렸다. 겨우 버스를 잡아 타고난 뒤에도 긴장을 놓지 않았다. 언양에서 내렸다. 표를 팔아야 하는 정류장이 닫혀있었다. 서둘러 알아보니 기존 정류장에 문제가 생겨서 여기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임시정류장을 만들어 거기서 표를 판매한단다. 거리는 걸어서 10분, 버스시간도 10분 남았다. 놀랄 시간도 없다. 무작정 뛰었다. 결국, 신평으로 가는 버스에 탑승했다. 물론 기사님께 정확한 목적지를 확인한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신평버스터미널에 떨어지니 저녁 10시가 넘은 늦은 시간. 이제는 숙소를 잡을 일이 막막하다. 주변을 둘러보니 아주 크게 ‘24시간 사우나·찜질’이라고 적혀 있는 간판이 눈에 들어온다. 저 불빛이 오늘 고생했다고 주는 마지막 보상인가 싶어 피식 웃고는 깜깜한 어둠 속에서 반짝반짝 빛나는 간판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
전국 30개의 도시, 100여개의 공간을 다녀왔습니다.
국내배낭여행을 계획하시는 분들에게 영감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원고 제의 및 협업 요청은 언제라도 환영입니다.
쪼렙여행자 인스타 (@jjolevel_travel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