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긋 아기씨>
옛날옛날 아름다운 왕비님이 살았어요. 왕비님이 사는 궁궐은 아주 크고 화려했어요. 시간이 흐르고 아기씨가 태어낫어요. 모두가 불꽃을 터트리며 축했어요.
그 날부터 왕비는 하루 종일 아기 생각 뿐이었어요. 아기씨를 위해 무엇이든 다 해 주고 싶었어요. 잠시도 아기씨 곁을 비우지 않았어요. 하지만 아기씨는 웃지 않았어요. 왕비는 가장 좋은 옷, 가장 맛있는 음식, 가장 웃긴 광대를 데리고 왔지요. 모든 게 실패했어요. 아기씨를 웃기지 못하고 끌려가던 마술사가 깃텃로 왕비를 간지럽히며 마지막 발악을 했어요. 낙담한 표정이었던 왕비가 간지러워서 갑자기 마구 웃었어요. 그랬더니 아기씨가 웃어요. 왕비를 보고 웃어요. 방긋 웃어요.
(이상 그림책 내용)
<방긋 아기씨>는 무채색의 선이 굵은 그림체에 아기씨와 왕비의 얼굴에만 색이 쓰였다. 작가가 강조하고 싶은 곳에만 색을 절제해서 쓴 그림이 글 속 왕비의 내면을 잘 전달한다. 크고 화려한 궁궐에 살지만 어딘가 우울하고 힘들고 슬프며 차가운 왕비의 얼굴은 푸른색이다. 살구빛을 띄는 아기씨 피부색과 대조적이다. 아기씨가 웃지 않아 온갖 노력을 다하지만 실패할수록 왕비 얼굴은 더 파래지는 듯하다.
그런데 깃털에 웃게 되면서 왕비 얼굴에 혈색이 돈다. 왕비도 살구빛 피부색이 된다. 아기씨 눈에 비친 웃는 왕비 얼굴. 화면 가득 눈동자를 그리고 눈동자 안에 왕비를 그려 넣은 그림은 아기 눈에 왕비가 어떻게 비치는지 직설적인 느낌을 독자에게 전달한다. 산해진미도, 금은보석 보다도 엄마의 따뜻한 시선과 눈맞춤이 필요했던 아이, 그러한 시선에 웃게 되는 아이를 그림으로 말한다.(그림책의 힘이다) 담담한 글과 절제된 색, 눈동자가 확대되는 구조를 통해 아이와 엄마의 눈맞춤, 상대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따스한 시선임을 말하는 그림책이다.
<방긋 아기씨>는 따스한 시선을 말하는 그림책인데 나는 왜 화가 날까? 아기씨가 웃을 때 나도 안도하며 웃엇지만 그건 그거고 화가 난다. 아니 도대체 왕은 어디 간 걸까? 왕비가 얼굴이 파래지도록 아기씨를 위해 고군분투 하는 동안 그는 어디서 뭘하고 있었던 걸까? 하루 종일 홀로 아기씨만 봐야했던 왕비를 보면서 말 못하는 아이를 안고 잠들고, 화장실을 갈 때도 아이를 안고 가던 시절이 생각난다. 내 곁에 없었던 남편이 생각난다. 화가 난다.
우리 부부는 남편이 박사과정 대학원생이고, 나는 직장에 다니면서 대학원생이던 시절에 만났다. 경기도에 있는 기숙학교에서 아이들과 엎치락 뒤치락 하느라 연애할 기운도 없던 내가 서른이 되면서 다시 대학원에 진학했다. 교사 자격증을 따기 위해 다닌 대학원 말고 정말 궁금했던 걸 공부하기 위해 간 곳이었다. 신촌 대학가 바람이 코에 들어가서 일까 서른도 됐는데 연애라도 해 보고 싶어졌고 소개팅으로 만난 사람이 남편이었다. 서른이란 나이에 누군가를 소개 받으면 대부분 직장인이었다. 그런데 직장인을 만나면 결혼 압박이 있을 것 같았다. 이에 비해 남편은 학생이니 부담 없겠다 생각하고 만났는데 이렇게 되버렸다.
결혼 안 하려고 만난 사람인데 연애, 결혼, 퇴직, 임신, 출산까지 척척 흘러갔다. 물론 퇴직은 예정에 없던 거였다. 학생 남편과 주말부부로 살다가 근무하던 학교에서 번아웃이 와서 이직을 준비하는 가운데 덜컥 임신을 했다.(퇴직자와 학생 부부가 아이를 낳았으니 우리 부부가 얼마나 대책이 없었는지) 아이를 낳으면 어떻게 육아할 것이며 이직 준비는 언제 다시 할 것인지 계획하지 못 했다. 우리 부부는 자연스레 보고 들었던 대로 우리 부모님들이 하는 대로 했다. 아이는 오롯이 내 몫이 되었고 남편은 밤늦게 들어오고 다음날 점심 때쯤 학교 연구실에 나갔다. 얼른 졸업해 취업을 해야하니까 나의 이직은 천천히 하면 되니까 그렇게 했다.
태어난 지 100일이 안 된 아이를 키워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겠지만 그때는 아이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다. 말도 못하고 기어다니지도 못하는 아이인데도 종일 아이를 보고 있어야 한다. 양육자에 따라 다를 수 있지만 나는 <방긋 아기씨>여왕처럼 종일 아이를 쳐다보고 있었다. 말도 못하고 움직이지도 못하는 아이니까 더 관심과 사랑을 줘야한다고, 자기 감정과 생각을 표현하기 힘든 저 어린 생명체가 얼마나 답답하겠냐는 생각에 눈을 뗴지 못했다. 아이랑 있는 동안 씻지도 못 하고 밥도 제대로 못 먹고 화장실도 제대로 못 갔다. 남편이 잠시 귀가하여 잠을 잘 때 그때 모든 일을 해결했다.
아이돌쯤 남편이 취업했고 직장을 따라 무연고지인 수원으로 이사 했다. 남편은 회사에 나갔고 나는 여전히 아이를 돌봤다. 이직 준비는 안드로메다로 떠났고 우리 부부는 남편 생계부양자와 전업주부 육아맘 가족 구성으로 세팅 되었다. 중요한 건 우리가 그렇게 하자고 합의한 게 아니라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그렇게 흘러갔다. 직장에 나가지 않으니 애는 당연히 내가 봐야하는 줄 알았고, 남편은 자신이 아내 직장보다 더 높은 임금을 받으니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답답했다. 아이는 같이 낳았는데 왜 육아는 오롯이 내 몫이어야 하는지 의문이 들었다. 일을 하고 싶었다. 아이를 누군가에게 맡길 수만 있다면 일을 하고싶었다. 하지만 남편도 나도 일보단 엄마가 애를 보자는 생각이었다. 둘이 협의한 게 아닌데 그렇게 흘러갔다. 그렇지만 남편과 내가 다른 점이 있었다. 나는 육아가 내 몫이어서 하는 게 아니라 엄마나 아빠 둘 중 누군가 육아를 해야 하는 데 그것을 내가 하는 것이고, 그래서 가정 경제가 유지되는 거라는 인정을 받고 싶었다. 육아는 엄마 몫이라는 고정관념에인정 받을 수 없었다.
“당신은 10년 동안 대학에서 공부한 거 써 먹으면서 일하잖아. 그런데 난 이게 뭐야. 내가 이럴라고 대학원 다니고 공부한 거 아니라고. 당신 보고 지금 하는 거 말고 기자를 하라거나 택시 운전을 하라고 미용일을 하라고 해봐. 그게 얼마나 안 맞는 옷인지.”
라고 소리쳤다. 육아가 내게 맞지 않는 옷이지만 입고 있음을 어필했다. 남편은 이해하지 못 했다. 그는 엄마가 아이를 보는 게 당연한 사람이었다. 다른 사람들 모두가 그렇게 생각해도 당신이라도 아니길 바랐는데 무계획 임신의 위험함을 깨달았을 때는 너무 늦었었다.
‘워킹맘, 직장맘’은 있지만 ‘워킹대디, 직장대디’는 없는 사회. 아이를 낳는다는 이유로 육아까지 오롯이 홀로 책임져야 하는 건 억울하다. 애는 뭐 혼자 만드나? 같이 만들었으면 육아도 같이 해야하지 않은가.
이런 억울한 마음이 가득차 있어서 일까? <방긋 아기씨>그림책을 보는 데 화가 난다. 외교, 국방, 정치 같은 큰 일 하느라 왕은 바빠서 못 오는 건가 본데 그거 왕비가 할 테니 왕도 좀 와서 애를 보란 말이다. 아기씨랑 눈 맞추고 웃어주고 하는 왕도, 아빠도 필요하단 말이다.
그림책 하나에 뭘 그렇게 감정이입을 하느냐, 작가는 아이와 교감하는 부모의 따스한 눈빛을 말한 거 뿐이니 안 그래도 된다는 말은 하지 말자. 육아는 엄마 몫이라는 사회구조가 공고한 가운데 왕비만 나오는 건 기존 구조를 더 탄탄히 하는 일이다. 그래서 독박 육아하는 왕비가 불쌍하고 지금 내 모습이 떠올라 화가 나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