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는 내 뒷배였다.
아빠가 날 사랑한 이유
우리집은 엄마, 아빠, 딸, 아들의 4인 가족이었다. 아빠와 딸이 한 편, 엄마와 아들이 한편을 이루는 이성애에 충실한 2 대 2 팀도 전형적이다. 그러나 이 팀 구성은 성별만 토대가 된 건 아니었다. 외모, 성격, 기질이 큰 부분을 차지했다.
아빠는 꼼꼼하고 빈틈없는 확신의 J다. 전날 일이 늦게 끝났든 상가집에 다녀왔든 어떤 일이 있었든지 간에 아빠의 출근시간은 6시였다. 현장에서 중장비를 운전할 때도, 이삿집 용달차를 할 때도, 택시운전을 할 때도 변하지 않았다. 반면 엄마는 확신의 대문자 P다.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로 끌리면 타라의 광고 문구와 어울리는 사람이다. 우리 가족이 외출할 때 풍경은 아빠가 먼저 준비하고 나가서 차에 대기한다. 나는 이미 준비 완료지만 아직 준비가 안 된 엄마 옆에서 종종 거리며 재촉한다. 동생은 빈둥대다 나가기 직전 화장실에 간다고 한다. 아빠 없이 셋이 외출할 때는? 도착 시간, 집에서 나가야할 시간을 모두 계산한 뒤 준비 완료한 내가 엄마와 동생을 재촉하다 답답해 밖에 나가 기다린다.
과묵하지만 유머가 있던 아빠는 “우리 딸이 심은하보다 이쁘지.”라고 말해 주는 다정함도 있었다. 물론 아들에겐 “저 새끼는 커서 뭐가 되려고 저래. 지 꺼 하나도 못 챙기고.”라는 독설을 하기도 했다. 일거수 일투족이 마음에 안 드는 아들과 자신과 닮은 딸을 대하는 아빠의 온도차이가 컸는데 이는 엄마도 만만치 않았다.
9남매 맏이인 아빠와 결혼해 맏며느리가 되어 첫 아이로 딸인 나를 낳고 시어머니에게 “딸이구만.”이라는 씁쓸한 이야기를 들어야했던 엄마. 엄마는 어릴 적에 남동생 신발 한 번 신어 봤다고 할머니에게 쇠꼬챙이로 맞아서 얼굴에 상처가 생겼다. 1950년대는 그런 시대였다. 엄마에게 아들은 자신의 존재 이유였다. 거기에 외모와 어디다 물건 흘리고 오는 기질까지 비슷하니 엄마에게 아들이 어찌 아니 이쁘겠는가.
이렇게 나열하면 우리 가족 내 2 대 2 균형이 괜찮아 보이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아빠는 주로 밖에 있고 나와 동생을 돌보는 사람은 엄마였다. 그러니 늘 2대1로 쫄렸다. 일 나간 엄마가 차려 놓은 밥을 먹고 나서 밥상을 치우지 않는 동생에게 먹은 것 치우라고 하면 동생은 말했다.
“놔둬. 누가 혼나는지 보자.”
새로 산 블랙진을 동생이 몰래 입은 뒤 자기 방에 아무렇게나 벗어 던져 쳐박아 놔서 엄마에게 이르면 “동생이 그럴 수도 있지 뭘 그러냐.”며 야박한 누나라고 혼났다. 니거 내거 뭘 그리 따지냐, 이기적이다는 말을 들으며 억울했다.
이렇게 2대1로 쫄려도 아빠가 있을 땐 괜찮았다. 명절에 윷놀이를 하면 나랑 아빠랑 편먹고 엄마랑 동생을 콱 눌러줬다. 평소에는 동생과 티비 리모컨 다툼이 심했는데 가끔 아빠가 있으면 아빠에게 리모컨 선택권이 쥐어졌다. 그런 아빠를 조정할 수 있는 건 나였다. 동생이 보고 싶은 만화 영화 대신 내가 보고 싶은 가요톱텐으로 채널 돌리고 ‘메롱’ 혀를 내밀었다.
아빠의 유산인 근자감이 낳은 선물 남편
아빠는 술, 담배를 많이 했다. 어릴 때부터 그런 아빠를 보며 ‘우리 아빠는 언젠가 큰 병에 걸려서 죽을 거야.’라는 죽음의 공포를 가지고 살았다. 벌어지지 않았으면 하는 일을 구체적으로 그리면서 다가올 일에 대한 두려움을 이기고자 하는 방어기제였다.
기숙사 학교에서 근무할 때였다. 주말에만 집에 가는 상황이었는데 아빠가 탈장으로 병원에 입원했다고 하면서 어디 병원인지 알려주지도 않고 부모님이 이상했다. 이상했지만 뭐 금방 퇴원하시겠지하고 말았다. 학기 중에는 학교 생활이 너무 바쁜데다 당시 대학원을 다시 시작하고 있어서 정신이 없었다. 그 와중에 5년 만에 소개팅하고 썸도 타고 있었다. 그러니 아빠의 탈장은 입력되지 않았다.
두 달 정도 시간이 흐른 뒤 엄마가 말했다. 아빠가 담낭암 말기고 시한부 3개월 선고를 받았다고. 당시 미국에 있던 동생에게도 나에게도 끝까지 말을 안 하려했던 엄마는 자식들이 아빠의 병 때문에 하고 있던 일에 지장 받을까봐 그랬단다.
드라마에서만 보던 시한부, 기적이 일어날까? 일어나지 않았다. 학기말 성적 처리를 끝내고(당시 성적 담당업무였음) 잠자리에 들었다. 새벽에 전화벨이 울렸다. 기시감이 들었다. 전화기에 뜬 사람의 이름이 무언가를 짐작하게 했다. 바로 준비해서 차를 몰고 병원에 도착했지만 이미 아빠는 숨을 거둔 뒤였다. 내가 올 때까지 기다렸다 영안실로 옮겼다.
‘어, 아빠가 좋아하는 호두파이다. 하나 사서 집에 가져가야겠다.’
파리바게트에서 소보루빵을 사다가 조각으로 파는 호두파이를 보고 집었다. 다시 내려놨다. 아빠가 없다. 호두 파이를 좋아하던 아빠가 사라진 걸 가슴이 받아들이기 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나의 뒷배가 사라졌다. 내가 발 디디고 설 땅이 사라졌다. 2대1의 쫄린 걸 엎을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결혼 후 시가에서 첫 명절을 지내고 엄마 집에 왔다. 엄마는 반가운 얼굴로 나와서 김서방 오느라 고생했다며 남편에게 어서 누우라고 했다. 안방에 자리 봐놨다며 누워서 자라고 한다. 아니, 시가에서 일하고 온 건 난데? 우리는 기차타고 오고 가고 해서 남편은 지 집에서 놀고먹고 하고 왔다고. 엄마, 딸은 나고 명절에 일하고 온 건 나라고!! 엄마의 이 명절 환영식은 15년차인 지금도 여전하다. 김 서방 수고했으니 쉬라하고 나보고는 엄마 힘든 데 좀 도우라고 한다. 만약, 아빠가 있었다면 어땠을까? 안방 이부자리는 내 차지였을 텐데.
한때 아빠가 남기고간 유산이 남편이라고 생각했다. 아빠가 시한부 선고를 받았을 때 썸타던 사람이 지금의 남편인데 연애 때는 아빠가 자신의 빈자리에 남편을 두고 간 거라는 착각이 들만큼 아빠가 주던 사랑을 남편이 주었다. 결혼 후에는 할말하않이다.
뒷배가 사라졌고 엄마가 김 서방 이부자리만 봐주지만, 남편은 아들이 됐지만 나에겐 근자감이 있었다.
“아니, 새우젓을 왜 그렇게 막 넣어?”
“당신은 요리를 왜 막해?”
남편의 평이 창의적이다. ‘맛이 있다, 없다, 짜다, 싱겁다’가 아니라 ‘막한다’라니. 맛이 없는 것도 아니다. 맛이 있는데 뭐가 불만이지? 최현석처럼 소금을 위에서 뿌리는 것도 아닌데 손을 떨며 넣지 않아서 문제인건가? 나는 김치를 담든, 꽃게탕을 하든 처음 하는 거라고 두려워하지 않고 일단 해 본다. 해보고 맛 없으면? 다음 번에 수정하면 되니까 그냥 한다. 남편은 이런 나를 보고 막한다고 평한다. 생각해보니 운전도 막한다고 말한다. 사고는 남편이 낸 게 더 많다. 조심히 하는 사람과 막하는 사람(그의 기준 막) 중 사고는 왜 조심히 하는 사람이 낼까?
좋아하는 일, 관심있는 일을 할 때 나는 뒤가 없는 사람처럼 지르고 본다. 바이올린 기행을 읽고 바이올린을 다시 해 볼까 생각한 뒤 집 주변 문화센터를 알아보고 중고 바이올린을 샀다. 40대 중반에 바이올린을 다시 시작해서 뭐 하겠냐 싶지만, 주1회 수업이라 진도가 느리지만 어찌됐든 해보는 거다. 좁은 골목길이라 후진으로 나가야하는 상황에서 갈 수 있냐고 묻는 남편에게 “그럼 가야지 여기 세워 둘 순 없잖아?” 한 마디를 남기고 후진한다. 낮은 담벼락을 보지 못해 쿵 부딪쳤지만 뭐 어떤가. 혼자 책 읽고 ‘우와 너무 좋아’하는 것보다 다른 사람이랑 수다 떨고 싶어서 아파트 단톡에 올려 책모임을 만들었다. 7년째 월 1회 독서모임을 하고 있다. 하고 싶은 게 있으면 일을 벌리고 보는 근자감. 이건 심은하보다 이쁘다고, 리모컨 선택권은 딸에게 있다고 해준 아빠의 믿음과 사랑이 준 유산이다. 이 근자감이 없었다면 박사과정 학생이었던 남편과 결혼하지 못 했을 거다. 언제 끝날지 모를 학생인 남편과 원룸에서 시작한 신혼 생활, 그때 나의 용기와 근자감도 남편은 막이라고 표현할까? ‘너는 나랑 막 결혼하드라?’ 아빠가 남겨준 유산인 근자감, 막의 정신, 용기가 있었기에 남편과 결혼했다. 결국 남편은 아빠가 준 유산이 맞았다.
파리바게트가 50% 할인을 한다. 여러 사람의 목숨을 앗아간 기업이라 이용하지 않는데 할인율이 크니 문을 열고 들어가게 된다. 오래 전 집었다 놓았던 호두파이. 영원한 나의 뒷배 아빠를 생각하며 오늘은 홀 파이로 고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