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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덤윤 Sep 14. 2016

나는 어떠한 사람이어야 했다.

그 시선들은 기대를 담고 있지 않았어.


 시선 (視線) [시ː선] [명사]
1. 눈이 가는 길. 또는 눈의 방향.  
2. 주의 또는 관심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나는 어떠한 사람일까. 언제나 누군가의 눈에 비치는 나의 모습을 생각한다. 때로는 조용하며 착해야 하고 성실해야 하는, 아니 그렇게 보여야만 하는 어느 정도의 기대치가 존재하는 관계에서 적정선을 찾으며 표류한다. 시간이 흐르고 나이가 먹어갈수록 적절한 지점에 가까워지나 싶다가도 스스로에 속아 곤두박질치곤 한다. 카멜레온의 보호색처럼, 혹은 그보다 더욱 변화무쌍하게 시시각각 나를 바꿨다. 주도적으로 의견을 내며 다른 사람을 이끌기도, 차분하게 남의 의견을 따르기도. 가끔은 커다랗기도 하고 작아지기도 했다. 나만의 보호색이었다. 적절한 색을 찾아내기 위해서는 쉼 없이 동그랗고 커다란 눈을 굴려야만 했다.     


  ‘너는 적이 없는 것 같다.’며 한 친구가 나를 평했다. 대단한 일을 해내고 있는 것처럼 혀를 내두르면서 말이다. 자기 주관이 뚜렷한 친구였다. 아마도 그것을 관철하다가 생기는 관계의 문제에서 지쳤을 때쯤이었던 것 같다. 생각해보니 여태까지 지내오며 딱히 등 돌린 사람이 없었기에 고개를 끄덕여 수긍했다. 

    

  사실 별 대단한 일이 아니었다. 같은 소속으로 묶여버린 피할 수 없는 관계들 속에 놓여 있었다. 단지 단 하나, 적을 만들지 않는 방법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던 것 같다. 미움받는 것을 두려워하는 나의 작은 마음이 만들어낸 해결책이었다. 적이 없기 위해서는 ‘내’가 없으면 됐다. 너무나도 간단한 일이었다. 남과 부딪힐지도 나를 지워내면 그만이다. 어릴 때 읽었던 우화의 박쥐처럼 여기저기 옮겨 다니며 모두의 편이 되어주니, 문득 주위를 돌아보았을 때 내겐 적이 없었다. 나의 이익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미움받지 않을 수 있다는 것에 만족했다. 물론 사람인지라 박쥐보다는 똑똑했던 것 같다. 박쥐가 겪었던 것처럼 양쪽의 문제에 모두 엮이게 될 것 같을 때에는 미리 발을 뺐다. 영악하게 나를 지켜냈다. 다신 보지 않을 것 같은 서로의 다툼에 있어서 언제나 그들의 편이었던 나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한 발짝 떨어진 곳에서 적당한 맞장구면 충분했다. 박쥐는 욕심이 많았을 뿐, 잘못된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어떠한’이라는 이미지는 편견으로 채워진다. 직접 대면하기 이전부터 만들어지기도 하고, 첫인상으로 결정되기도 한다. 그것은 어떠한 형태로든 텅 비어있던 공간을 제멋대로 채워버린다. 녹았던 쇠를 식혀 모양을 만드는 것처럼 아주 단단하게, 또 빠르게. 그 강도는 어떠한 충격에도 쉽게 모양을 흩트리지 않는다. 그리고 굳어버린 모양은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기도 한다.


  듣는 사람이어야만 했다. 타인이 필요로 할 때는 늘 함께 해줘야 하는. 무언가를 바라고 한 것은 아니었다지만, 정작 자신의 곁에는 아무도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을 때의 처량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고 했다. 아이의 손을 놓친, 한 때는 없이는 못 살 것만 같던 인형처럼 힘없이 뒹굴 뿐이었다. P는 그저 듣기만 하는 사람이 된 것 같다고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주었던 것만큼 돌려받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조금의 위로가 필요했을 뿐이라며 식어버린 커피 잔을 휘적거렸다. 복잡한 속내를 닮은 물결들이 일렁였다. 이미지는 아프도록 무서운 것이라 생각했다.          


  기대하는 이미지는 시간이 지날수록 눈에 보이는 것처럼 형태를 가졌다. 내게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느끼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타인의 시선 위에서 만들어진 속박. 발목을 죄고 입을 막고 눈을 가렸다. 밖으로 나아가기 위한 문틀은 점점 작아졌다. 내 몸을 몇 움큼 떼어낸 뒤에야 가까스로 지나갈 수 있었다. 그렇게 밖에 할 줄 모르는 것을 애석하게 여기면서도, 그렇게 밖에 할 수 없는 것을 원망하기도 했다. 어느새, 나에게서 태어난 이미지란 그림자는 나를 삼켜버리고 있었다. 나는 그것이 아니었지만, 그것은 분명 나로 인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내가 선택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것은 나로 선택되었다.      


어떻게 비춰질지.


  분명한 선택의 결과였다. 지금 이 자리에 있다는 건. 비단 나만이 아닌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마찬가지였다. 오래전 수학여행의 기억이 어디까지 정확한지에 대한 의구심에서 시작됐다. 아직도 식을 줄 모르는 경주 하늘의 태양만이 익숙할 뿐, 묵은 기억과 맞아떨어지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눈에 밟히는 것 하나하나가 새로웠다. 워낙 두리번거리는 바람에 다음 날 목이 아플 지경이었다. 오래도록 걷고 나서야 조금은 고단했던 선택이 낳은 만남. 작은 방 나무 테이블을 둘러싼 다섯 명의 집합이었다.     


  놀림받는 것은 썩 유쾌하지 않은 일이었다. 장난이 싫다고 하기보단, 오래전부터 자연스럽게 그 상황을 넘길 수 있는 방법을 알지 못했다. 어색한 미소보다 더 어색한 공기만 남길뿐이었다. 적어도 지금까진 그랬다.      


  학생이란 신분이 놀림감이 된 것은 꽤나 신선한 사건이었다. 스스로를 백수라 자신 있게 소리치는 네 사람이 너 혼자 학생이라고 놀리는 일이란, 정말이지 듣도 보도 못한 일이었다. 오히려 그 덕에 어색하지 않게, 눈치 살피지 않고 실컷 웃어넘길 수 있었다. 학생이 놀림의 대상이 되다니. 이보다 유쾌한 일이 있을 수 있을까. 누군가의 앞에서 얼굴을 그토록 구기며 웃었던 날이 있던가 싶었다. 말 그대로 적나라한 맨 얼굴이었다.     

   

  새로운 사람과 이야기들이 적은 술안주의 자리를 대신했다. 어색한 공기가 끼어질 틈도 없었다. 대화는 멈추지 않고 이어졌다. 낯가림이 심한 내 성격도 문제 되지 않았다. 그저 조금 조용한 것뿐이었다. 억지로 한 마디 비집어 넣을 타이밍을 계산하느라 머리 굴리지 않았다. 내가 좋아하는 대로 훌륭한 청자의 역할을 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그곳에는 몸서리쳐지는 부담감이 없었다. 그 곳의 시선들은 기대를 담고 있지 않았다. 내가 어떠한 사람이어야만 하는 부담감. 내가 응당히 채워야만 하는 기대를 가장한 부담 혹은 속박. 그 굴레에서 벗어난 자유로움을 온몸으로 느꼈다. 기뻐서 떨렸다.     

 

  게스트하우스에 모인 다섯 명의 만남의 끝이 어떠할지는 모두가 알고 있었다. 다음 날 이른 아침 헤어짐의 인사라도 할 수 있다면 그것이 최선일 것이다. 마지막을 알고 있기에 부담감은 없었다. 그래, 그곳에는 눈을 의식해야 하는 피곤함이 없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어떠한 사람이어도 좋았다. 실없는 농담을 던져도 문제 될 일 없었다. 재미없는 농담은 그 자체로 우리에게 색다른 재미가 되었다. 우리는 누구여도 상관없었다. 그저 같은 시간, 그곳에 각자의 선택으로 함께 있었을 뿐이다.


  

  

  타인의 시선에 맞추는 일이 이제는 익숙하다고 생각했다. 그러한 것이 최선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우리의 관계를 원만하게, 문제없이 이어가는 데는 그만한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곳에서 멀어지고 나서야 비로소 흠뻑 젖어있는 몸을 내려다 볼 수 있었다. ‘우리의 관계’가 아니었을지도 모르겠다. 혼자 지켜내던 수많은 ‘너와의 관계’.


  그래서 즐거웠다. 부담감 없는 짧은 만남이. 그 새로운 즐거움을 알게 됐음에 감사한다. 이성적인 사람이라는 얘기를 종종 듣기도 하지만, 아직 어리다 생각하는 나는 낭만을 믿는다. 나아가 인연을 믿는다. 짧은 시간 가볍게 나누었던 서로의 생채기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아물기를 바란다. 짧았던 인연이 다시 이어져 길게 늘어날 수 있는 날을 상상하며.


  진심을 담아. 미뤄뒀던 작은 욕심을 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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