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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덤윤 May 25. 2018

이렇게 또 멀미

메스꺼운 관계들을 위하여


멀미 [멀미]
[명사] 1. 차, 배, 비행기 따위의 흔들림을 받아 메스껍고 어지러워짐. 또는 그런 증세.




멀미의 그 느낌은 정말이지, 참 싫다. 울렁이고 메스꺼움. 멀미가 날 때는 허기가 지곤 했다. 그것은 말 그대로 공복(空腹). 소화할 음식물이 부족한 것이 아닌, 내 안의 모든 장기들, 심장부터 시작해서 유난히 허전한 장(腸)이 사라져버리는 듯한 느낌. 한 번 일어난 멀미 기운은 쉬이 가라앉지 않고 부지런히 나를 흔들었다. 안그래도 예민한 성격이 그때가 되면 고드름처럼 한껏 날카로워졌다. 반대로 몸은 제대로 가누지도 못했다. 그저 기약 없는 끝을 향해, 내뱉지 못할 비속어들을 입 안에서 굴릴 뿐. 그게 나의 최선이다. 내가 걷는 것을 좋아하게 된 것은 필연이었다.


인류사에 있어서도 커다란 발명인 차, 기차, 비행기 그리고 즐거움 가득한 놀이기구까지. 나는 어느 것 하나 맘 편히 타 본 적이 없다. 유별 맞은 성격 때문에 신경성 장염까지 더해져서, 장거리 이동은 도무지 답이 없다. 불가피하게 타야 할 일이 생기면 며칠 전부터 관리에 들어가고 온갖 약들을 상비해둬야 한다. 평소 흥미 없던 종교에 대한 애정은 장거리 이동에서 꼭 솟아난다. 다행스러운 것은 절대적인 존재가 정말 있는지, 나의 믿음은 배신받지 않았다. 간혹 그들을 저주할 뻔하기도 했지만.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누군가 말했다지만, 도저히 이 놈의 멀미는 친해질 수가 없다. 이제는 내가 빌미를 주지 않아도 찾아오곤 한다. 애석하게도 내가 밟는 이 땅은 끝없이 돌고 이동 중이라더라. 멀미가 심한 사람에 대한 배려라곤 도무지 찾아볼 수가 없다. 속이 텅 빈 뱃가죽을 부여잡고 앓으며 울렁거리는 하루를 넘긴다. 어떻게 보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24시간.


대략 지구는 한 시간에 1,667km의 속도로 자전을 하고, 또 태양의 주위를 약 107,300km/h로 공전한다고 한다. 참 부지런하다. 시속 80km도 안 되는 속도에서도 지독한 멀미에 죽을 것 같이 끙끙대는 데, 체감도 되지 않는 속도 위에 올라서 있다. 어쩌면 내게 멀미란 당연한 현상이었나 보다. 이토록 부지런하게 돌아가는 세상을 쫓아가기에 나는 너무 게을러서. 이렇게 또, 멀미가 난다.




또 언제 멀미가 나더라 생각해봤다. 잠 못 드는 지친 잠자리에서 소리 없이 피어난 기억. 인간관계는 섬과 같다했지. 지금 이불 위 오로지 혼자 남은 모래섬처럼. 하루를 버티며 찾아오고, 찾아갔던 사람들은 모두 저마다의 섬으로 돌아가 온전히 자신이 되었을 거야.

수평선 끝에 걸친 여러 섬들. 지구가 빠르게 회전하는 만큼, 파도에 쓸린 수많은 섬들이 나의 섬과 부딪힌다. 사람 가득한 지하철에서 어깨에 치인 듯 휘청이고, 익숙한 섬들이 반가워서 덜컹인다. 충돌이 만들어낸 파도가 모래섬을 쓸어간다. 일광욕을 즐기던 모래들은 깊은 바다 아래로 가라앉는다. 손바닥만 해진 모래섬. 남은 온기라도 붙잡으려 이불을 덮는다. 잠들기를 기도하는 가쁜 호흡. 차츰 다가오는 일렁임은 파도를 닮았고, 메스꺼운 속을 태운다. 오늘은 소모가 좀 많았던 것 같다.


나를 들여다보는 일엔 안타까운 감정소모가 필요하다. 하물며 남을 대하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다. 보이는 것보다 멀리 있는 우리의 거리. 두 섬 사이를 오가며 느끼는 간극의 괴리. 이럴 줄 알았으면 겁 없이 시작하지 말 걸 내뱉는 이미 늦은 후회. 사람 한가운데에서 흔들린다. 흔들리는 나를 보는 것이 역겨워 토할 것 같다. 멀미가 나면 먼 곳을 보라고 했었나. 고개를 들자, 텅 빈 항구의 등대가 흩어졌다.



아침 해와 함께 간신히 내려앉아 심호흡을 한다. 귀갓길 신호등이 파란 불이어서, 매일같이 오가는 거리가 너무 익숙해서 멀미는 불쑥 날아든다. 이런 날이면 공복이 적당하다. 더 담아내려다간 분명히 토하고 말 테니까.


기대가 없는 아득한 시간, 오늘을 비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또 끌어안으려 흠뻑 젖고,

이렇게 또, 멀미를 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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